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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나를 살려냈던 수학 선생님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5. 1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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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나를 살려냈던 수학 선생님
문제지만 베껴내도 점수를 준 선생님 선택은 탁월했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규환(kgh17) 기자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을 지나고 나서 근 3년 동안 학교를 절반가량 빼먹는 불량학생이 되었다. 아이들과 놀다가 뜻하지 않는 사고로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말귀는 잘 알아듣는 나였기에 다른 과목은 쉽게 적응할 수 있었지만 산수와 수학과목은 달랐다.

나눗셈부터 배우지 못해 쩔쩔 매고 있었으니 국영수 세 과목만 시험을 치를 때는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전형적인 인문계 체질로 변해갔다. 전과목을 볼 땐 시골 중학교에서 전교 4~5등을 하던 아이가 4~50등 아래로 곤두박질 치곤 했다.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내 학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교 3학년 7월과 2학기 초에 본 모의고사에서 수학 55점 중에서 14점을 연거푸 맞는 경험도 떨칠 수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대입고사 보기 일주일 전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 25점을 간신히 넘겨 평소 성적을 회복하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다른데서 받은 점수를 늘 까먹는 수학은 학교에서 치르는 내신성적에서도 낙제점인 40~50점대를 오르락내리락 했으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속된 말로 그냥 찍어도 그 점수는 나오지 않는다고 늘 선생님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래서 난 수학이라면 이가 갈린다. 아니 지금도 숫자만 나와도 쩔쩔맨다. 암산은커녕 더하기, 빼기도 쉽지 않고 곱하기도 힘겹다. 특히 나눗셈이 나오면 계산기로도 원하는 값을 구하기 힘들어 분자와 분모를 한번씩 앞에다 놓고 두들겨 보고는 근사치가 나올 때 둘 중 아무거나 고르는 형편이다.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 본다. 나는 중학교 성적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 고교 진학시 장학생으로 가게 되었다. 신설된 시골 고등학교라 10개 반 중 1반에 해당되는 인원이나 광주로 진학할 성적이 될 정도로 공부와 담쌓고 사는 급우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고교 1학년 때 성적은 국어만 빼고 중위권을 달렸다. 결국 6등급 이하로 처졌다. 2학년이 되자 정신을 차리고 기숙사에 입사하여 공부에 몰두하자 다소 성적이 오르기는 했다. 그런데 수학 점수는 오르기는커녕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온몸에 열이 나고 머리까지 화끈거려 절반도 못 풀어보고 시험시간이 끝나기를 반복했다.

포기할 상황이 다가왔다. 내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선생님께서 먼저 포기할 판이었다. 급기야 나는 학교를 뛰쳐나와 서울로 도망을 쳤다. 일주일 간 서울을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가기는 했으나 그 뒤로 선생님들은 정말로 나를 포기한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도 수학과목과 친하게 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2학년 때 수학 선생님이다. 목소리가 낭랑하여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하고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처녀 선생님이었다. 공부와 담쌓고 살던 아이들도 그 선생님만 들어오면 잠이 확 달아났다.

하지만 잘 갖춰진 미모에 정갈함까지 겸비한 선생님은 무서운 데가 있었다. 어찌나 무지막지하게 매질을 해대는지 웬만한 남자 선생님들의 매보다 더 아팠다. 수업 분위기를 망치는 아이는 가차 없이 불려나가 뭇매를 맞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시골학교에도 과목별로 쟁쟁한 아이들이 즐비했다. 나는 국어에서만큼은 전교생 또는 전국에서 시험을 치러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학에서는 늘 하위권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통에 급우들 사이에서도 만만한 존재였다. 열심히만 하면 수학만 빼고는 김규환이처럼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으니까.

각설하고 고교 2학년 1학기 중간시험 날이었다. 등사기로 밀어댄 A3규격에 가까운 8절지 크기의 시험문제지가 돌려졌다. 또한 답안지도 한 장 돌려졌다.

어찌나 빼곡히 글자와 숫자, 기호를 섞어가며 문제를 냈던지 순 주관식 시험지는 빈공간이 없을 정도로 까맸다. 그걸 보고 또 한 장에 풀이과정과 답을 적어내는 게 시험이었다.

그래도 사지선다인 객관식이라면 몇 개라도 맞춰볼 것인데 죄다 풀이를 하라니! 사실 반에서 두세 명 빼고는 멀뚱멀뚱 쳐다보거나 잠을 청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나도 그에 해당되었으니 그때 그 고역은 시위 후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당하는 것보다 더했다. 나에겐 형벌이었다.

그날 지독한 수학시험은 몸이 달아오르며 막을 내렸다. 수학이 밉고 수학선생님이 밉고 그에 속수무책인 내가 미웠다. 그래도 풀어본다고 빼곡히 썼는데도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50점에 미치지 못한 형편없는 성적이라니!

며칠 지나지 않아 수학성적이 발표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각자 답안지를 나눠주며 한번씩 보라고 하셨다. 그 사이 점수를 차례대로 불러나갔다. 그러고 나서 말씀을 이어갔다.

“자자, 여러분 잠깐만! O천구 일어서봐. 천구는 말야 이번에 48점 맞았어. 그런데 천구가 답을 맞춘 것은 고사하고 문제풀이를 하나라도 제대로 했던 게 아니야. 그런데 이 점수가 나왔단 말예요.”

이상했다. 천구라는 친구는 평소 잘 아는 사이라 수학문제를 한 문제라도 풀기 어려운 학생이다. 그런데 어떻게 했길래 그 점수를 받았지? 선생님께서는 친구의 답안지를 한번씩 구경해보라 하셨다.

언제나 시험시간 5분을 넘기지 못하던 그 친구는 선생님께서 내줬던 주관식 문제를 토씨하나 마침표 하나 빠트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베껴냈던 것이다.

‘아 그래! 저거야. 천구도 기특하지만 선생님도 보통분이 아니네. 저렇게 관심을 쏟으면 언젠가는 풀리는 게 문제 아니던가. 어찌 나는 그리 급하게 당장 답을 구하려했던가’하는 반성이 밀려왔다.

수학 선생님은 온갖 기행을 일삼던 천구를 살려냈다. 그리고 나를 살렸다. 지옥과도 같았던 수학에서 나를 건져낸 정서영 선생님! 그해를 끝으로 혼인을 앞두고 학교를 떠나갔지만 난 그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한다. 어차피 포기한 아이들에게 명확한 답을 요구하지 않았던 선생님이었다.

학년이 끝나갈 무렵 우린 선생님과 구창모의 “희나리”를 부르며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 얼마 전 동창 몇몇이 만나 그 선생님 소식을 서로 묻지만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천구라는 아이는 반에서 꼴찌를 면치 못하던 아이였다. 그날 수학 점수가 학창시절 최고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교 동창과 결혼하여 지금은 어엿한 대기업 사원으로 재직하며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날 선생님의 선택은 탁월했다.
85년 전남 창평고등학교에서 2학년 수학을 가르치시고 학교를 떠났던 <잊지 못할 스승> 정서영 선생님을 찾습니다.

2004/05/15 오전 8:0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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