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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딛고 일어선 '클론'의 강원래씨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6. 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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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괜찮아요, 그냥 봐주시면 돼요"
[인터뷰] 장애 딛고 일어선 '클론'의 강원래씨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강이종행(kingsx69) 기자   
▲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된 '클론'의 강원래씨,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valign=top[인터뷰] 장애 딛고 일어선 클론의 강원래씨 / 강진국

"언젠가 한 대학에 강연을 갔죠. 학생들에게 인사를 전하는데 연예인과 장애인 버전을 나눠 했습니다. 연예인 버전은 이랬죠. '여러분 클론의 강원래입니다. 여러분 만나서 정말 반갑고요. 이렇게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장애인 버전이라며 이렇게 말했죠. '에잇, XX! 이놈의 학교에는 왜 계단밖에 없어. 내가 몇 번이나 들려서 왔는지 알아? 내가 짐이야? 나 혼자도 할 수 있는데 꼭 이렇게 X팔리게 도움이나 받아야겠어? 이 학교엔 장애인 없나?'라고 그랬더니 많이 놀라더라고요."(웃음)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된 '클론'의 강원래(35)씨. 위 내용은 그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턱 때문에 순간 순간 힘겨움을 느껴야 하는 장애인으로서의 그와, 이미 오래 전부터 겪어왔을 연예인으로서의 그.

"사실 클론 시절보다 훨씬 책임감이 커졌어요. 당시엔 잘못하면 저 혼자 욕먹으면 됐는데 이제 제가 실수하면 '장애인'을 싸잡아 욕하니까요. 하지만 아직 앞에 나가서 피켓 들고 시위는 못하겠어요. 저는 제 자리에서 운동을 펼쳐야죠."

그의 말처럼 그는 이미 장애인을 대표하는 연예인이 돼있었다. 강씨는 이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짜증난다", "똥 밟았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의 언행은 이미 '그들의 희망'이었다.

오랜만에 높은 구름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 선선함을 느꼈던 5일 오후,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 앞뜰에서 강씨와 만났다. '제2회 주니어리더십 페스티벌'의 강연자로 나선 강씨와의 인터뷰는 행사 전후, 약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장애 딛게 해준 장애인 친구들

강씨는 지체장애 1급이다. 그는 가슴 밑으로 감각이 전혀 없다.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양손으로는 무릎을 받치고 있어야 한다. 손을 놓으면 금방 몸이 앞으로 기운다. 스스로 허리를 가눌 수 없기 때문이다.

"소변은 4시간마다 호스를 꽂아서 빼고 대변은 마음대로…. 성욕은 물론 심지어 배고프고 배부르다는 느낌조차 없어요. 배고픈 건 어지러움을 느낄 때고 밥을 먹다가 힘들게 되면 배가 부른 거죠."

지난 2000년 11월 9일,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하려는 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뒤 3년이 훌쩍 지나갔다. 강씨에게 매순간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처음엔 매일 밤 눈물을 흘렸다. 아내인 김송(32)씨에게 폭언을 퍼붓기도 했고 극도의 우울증 증세와 대인기피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에게 '적응'이라는 선물을 줬다. 특히 그는 같은 장애인들과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 장애를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 강씨를 이용해 '한 몫 잡아보려는' 각종 도사와 치료사들의 연락을 받는 가운데, 장애인 친구들은 진지하게 '장애인으로서 세상 살기'를 나눠줬다고 한다. 강씨는 그들과 함께 여행도 다녀왔고 같이 영화도 보러 다니는 등 서서히 치유의 과정을 밟아나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송이를 위해 끓인 라면... 너무 뿌듯"

강씨가 아픔을 딛고 이겨나갈 수 있게 해준 이는 역시 아내 김송씨다. 이미 지난 2001년 혼인신고를 올렸지만 지난해 10월에야 결혼식을 올린 그들이다. 10여 년의 연애 기간을 거쳤지만 그야말로 '똥오줌'을 치워주며 살아야하는 김씨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가 아픔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송이 때문이죠. 물론 송이가 그렇게 됐다고 해도 나도 그랬겠지만 고마울 수밖에 없죠. 물론 처음엔 떠나보내려고 했지만 (송이는) 그렇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회는 김씨를 곱게 보지 않았다. '강씨의 돈을 노린다', '보험금을 타기 위함이다'는 등 근거 없는 소문들이 돌아다녔다. 특히 지난해 4월 강씨의 보상금이 21억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전후에는 정도가 더욱 심했다.

"내가 송이를 아는데 그 친구는 돈에 욕심이 없어요. 돈 만원을 잃어버려도 울었어요. 내가 군대 있을 때 생일 선물로 '버스노선도'를 사줬죠. 항상 버스만 타고 다녔는데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거든요. 사실 보험금 오해를 없애기 위해 강릉에 빌딩을 지었어요. 돈 벌려면 서울에 지었겠죠. 지금 보험금은 저희에게 없어요."

강씨는 아내에 대해 단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제 강씨가 조금씩 아내를 위해 선물을 준비할 차례.

"항상 내게 도움만 주는 송이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는데 올 초 (가수) 활동을 다시 시작한 송이를 처음 방송국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어찌나 눈물이 나오든지…. 또 가끔 송이가 피곤할 때 내가 직접 라면을 끓여줬어요.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데 그 때의 뿌듯함이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웃음)

제일 듣기 싫은 말 "쯧쯧쯧"

ⓒ 오마이뉴스 남소연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사회에 나왔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순간 한 중년 여성이 강씨에게 와 사진을 찍자고 한 뒤, "힘내세요"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주 잠깐동안 강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쯧쯧쯧'예요. 그나마 듣기 좋은 말이 있다면 '괜찮으세요'란 말인데, 내가 거절하면 그냥 모른 체 하고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사랑이 너무 커서' 부담스러웠죠. 한번은 휠체어 타고 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오시더니 제 손을 확 잡았어요. 그리곤 '거봐 강원래 맞지'라고 옆 사람에게 말하더라고요. 전 당연히 땅바닥에 떨어졌죠. 하체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혼자 휠체어 타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 아주머니는 또 제 손을 잡고 일어나 보라고 하는 겁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도움,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장애인… 그에게는 큰 상처라고 한다. 물론 장애인을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강씨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언젠가 지방의 한 식당에 들렀다 나오는데 등뒤에 대고 주인이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이런 시선과 행동들에 대해, 언제인지 모를 컴백을 위해 랩가사를 만들어놨다고 한다. 소개를 부탁했다.

"'어이구, 힘든데 왜 밖엔 나와', '두다리 없으면서 어딜 돌아다녀' 등 도와주는 척하며 무시하는 아줌마들에 대한 가사도 있고, 처음엔 너무 미웠지만 죽을 때까지 친구일 수밖에 없는 휠체어에 대한 것도 있어요."

"나의 직업은 라디오 DJ와 댄스학원 원장"

인터뷰 도중 수차례 걸쳐 팬들이 사인을 부탁한다. 일일이 사인을 해주는 솜씨는 역시 베테랑이다. 가수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질문을 던졌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온다.

"가수에 대한 매력은 없어요. 해볼 거 다 해봤으니까요. 상도 받았고 음반 100만장도 넘겨봤어요. 사실 제 꿈은 아담한 집에 송이가 집에 있고 두명이 아이가 뛰어놀다가 제가 일 끝나고 집에 오면 '아빠!'하고 달려오는 거죠. 아 물론 때가 되면 클론 활동을 다시 할겁니다."

평범한 가장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다는 뜻. 그가 평생 직장으로 선택한 직종은 바로 '라디오 DJ'다. 강씨는 지난해 10월부터 KBS 해피FM '강원래·노현희의 뮤직토크'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DJ는 세상에 강원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의미로 시작했죠. 지금은 힘들지만 배철수 선배처럼 믿음이 가는 방송을 하고 싶어요. 아! 그리고 강릉의 건물 지하에 '클론댄스 스쿨'이라는 이름으로 댄스학원을 7월 중 오픈할 예정입니다. 인테리어 하고 있고요. 타 학원과 차이점이 있다면 저희 학원 강사들은 다 저와 함께 했던 댄서들이에요. 음, 이제 제 직업은 DJ와 학원원장 정도가 될 것 같네요." (웃음)

대화를 나눈 2시간 이상 대부분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기자는 '감히' 그 내면의 아픔과 고통을 어느정도 볼 수 있었다. 인터뷰를 끝낸 뒤, 강원래씨가 휠체어에서 자신의 차로 몸을 옮기려 한다.

- 도와드릴까요?
"전 괜찮아요. 그냥 봐주시면 돼요."

- 혹시 현재 자신에게 점수를 매긴다면?
"40점이요. 좋은 점수는 절대로 못 주죠. 많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졌어요. 병원에서의 각오와는 많이 달라졌어요. 송이에게도 미안하고…. 사실 (기자와)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할 땐 아무렇지도 않은데 헤어질 땐 난 휠체어에 앉아있고 기자님은 서서 걸어가잖아요. 차 타고 가다보면 묘해요. 장애는 이길 수 있어도 내 마음은 이길 수 없는 것 같아요. 평생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안녕히 가세요."

▲ 강원래씨는 5일 주니어리더쉽 페스티벌에 참가한 청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자가운전식 맞춤형으로 개조한 승용차를 몰고 왔다. 가끔씩 쳐다보기 싫을 때도 있지만 가슴밑으로 감각이 전혀 없는 강씨에게 휠체어는 '두 발'이상의 의미가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날라리로 먹고살라'는 선생님 말씀 전하러 왔다"
청소년 리더십 강연 나선 강원래씨

▲ 강원래씨가 5일 '제2회 주니어리더십 페스티벌' 참가 청소년들에게 강연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처음에 청소년들에게 강연을 해달라는 제의를 받고 황당했어요. 난 공부는 50등 안에 든 적이 없고 야구부원들보다 성적이 좋지 못해 꼴등도 경험해봤죠. 고1때 IQ는 68이었어요. 다 찍었기 때문이죠. 그런 제가 어떻게…. 고민을 하다 고3 때 담임선생님께서 '네가 날라리라면 날라리로 먹고살아라'라고 말씀하셨고, 그게 용기가 돼 이런 자리까지 서게 됐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전해주자고 마음먹었죠."

5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미래의 리더들을 위해 열린 '제2회 주니어리더십 페스티벌'의 강연자로 나선 가수 강원래(35)씨. 강씨는 이날 행사 중 가장 많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의 말처럼 학과 성적은 안 좋았을지 모르지만 춤꾼과 가수로서 최고로 인정받았고 장애를 딛고 성숙한 모습으로 1318들 앞에 섰기 때문이었을 것.

강씨는 휠체어에 탄 채, 학생들에게 삶 속에서의 고집과 변화에 민감함, 그리고 평범함 속에서의 가능성의 발견 등 '강원래식 리더론'을 참가자들과 펼쳐보였다.

이날 강의에서 강씨는 "공부는 못했지만 춤에 대한 욕심은 대단했다, 나보다 잘 추는 사람이 나오면 옷을 벗으면서까지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며 "미군 클럽에서 흑인을 상대로 1등을 차지했는데 그때 2위가 양현석과 이주노씨였고 4위가 박진영씨였다"고 '춤꾼'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학생들에게 전했다.

이와 함께 강씨는 "고집은 좋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변화에 민감한 것"이라며 "같은 음악에 춤을 춰도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동작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시대를 앞서나가는 학생들이 되라고 북돋았다.

2004/06/07 오전 10:43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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