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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탱자 알알이 박힌 그 가시나네 집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11. 7.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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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탱자 알알이 박힌 그 가시나네 집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02>감기, 피로회복에 좋은 '탱자'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종찬(lsr) 기자   
▲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
ⓒ2004 이종찬
내가 스무 살 시절까지 살았던 경남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길게 둘러쳐진 초가집이 대여섯 채 있었다. 도랑가 건너 산숫골에 두어 집 있었고, 새칫골로 가는 도랑가 주변에도 서너 집 있었다.

그 중 나는 우리 집과 10여m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던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가시나네 집을 둘러싸고 있는 그 탱자나무 울타리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멋지고 길었다. 게다가 가을이 오면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유독 노란 탱자가 많이 매달렸다.

그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낡은 초가지붕과 허물어져가는 싸리담장을 걷어내고 새로운 옷을 입혔다. 하지만 그 가시나네 집은 담장 하나만큼은 새롭게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 가시나네 집은 우리 마을 어르신들이 노란 새끼줄로 싸리나무 울타리를 열심히 엮고 있을 때 탱자나무 울타리에 삐쭉삐쭉 솟은 가지를 반듯하게 쳤다. 마치 이발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 탱자는 감기, 피로화복,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2004 이종찬

▲ 보석처럼 알알이 매달린 노오란 탱자
ⓒ2004 이종찬
"아부지! 해마다 와(왜) 사서 고생을 하십니꺼? 우리 집 담장에도 고마 탱자나무로 심어뿌모(심어버리면) 될 낀데."
"니는 이웃집 사람하고 가시담을 쌓아놓고 사는 기 그리 좋게 보이나. 그라고 집안에 훔쳐갈 끼 뭐가 있다꼬 가시가 삐쭉삐쭉한 탱자나무 울타리로 담까지 쌓을 끼고. 집이 머슨(무슨) 까막소도 아이고."
"그라모 탱자나무 가지치기로 할 때 낮게 치모 될 꺼 아입니꺼?"


그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탱자나무 울타리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한 동네에 사는 마을사람들끼리 숨길 게 뭐가 있느냐는 투였다. 파전 한 장을 부치더라도 야트막한 싸리담장 너머로 건네주면 될 것을 굳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아나갈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가 좋았다. 코흘리개 시절, 마을 공동우물가에서 소꿉놀이를 할 때마다 나랑 신랑 각시가 되어 놀았던 그 가시나가 그 탱자나무 울타리 집에 살아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 감기에는 탱자껍질을 우려낸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2004 이종찬

▲ 잘 익은 탱자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어린 날로 되돌아간다
ⓒ2004 이종찬
아무튼 나는 봄마다 동글동글한 탱자꽃을 하얗게 말아 올리고, 여름마다 나와 동무들에게 파란 탱자구슬을 선물하는 그 탱자나무 울타리가 너무도 정겨웠다. 특히 가을이 되면 나와 동무들은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 곳곳에 보석처럼 노랗게 박힌 탱자를 한 알이라도 더 따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그럴 때마다 그 가시나는 마루에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가시에 찔려가며 탱자를 따고 있는 나를 뻘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루 아래 놓인 긴 장대라도 갖다 주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하지만 그 가시나는 내가 잘 익은 탱자를 하나라도 더 따기 위해 아무리 끙끙거려도 그림처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으~ 올개(올해) 탱자는 가시나 저거 맴(마음)처럼 와 이래 쓰노?"
"와? 저 가시나가 탱자 딴다꼬 뭐라 카더나?"
"그기 아이라 가시나 저기 시방 내로 딱 무시하고 있다 아이가."
"니 혹시 가시나 저거 좋아하는 거 아이가?"
"아… 아이다."
"근데 와 니 목소리가 떨리노?"


그해 늦가을,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 매달린 노란 탱자는 하얗고 굵은 씨가 유난히 많고 몹시 썼다. 노란 탱자 속을 쪼개 입에 넣으면 양 턱에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하지만 그 쓴 맛 뒤에 코끝으로 스며드는 향긋한 탱자 향기와 달콤하게 스며드는 탱자맛은 그만이었다.

▲ 내가 살던 마을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참 많았다
ⓒ2004 이종찬

▲ 가을, 하면 나는 그 가시나네 집에 매달린 노오란 탱자가 떠오른다
ⓒ2004 이종찬
그날, 나와 동무들은 그 가시나네 집 탱자를 양 주머니 볼록하게 채워넣고 마당뫼 고인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때 나는 툭 하면 토라지는 그 가시나의 마음처럼 쓰디 쓴 탱자를 인상을 잔뜩 찌푸려가며 맛나게 까먹었다. 손가락과 입술에 탱자진이 묻어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니 주디(입술)가 와 그렇노? 탱자 좀 따오라 캤더마는 고마 다 묵어뿟나?"
"안주(아직) 쪼매 덜 익었어예. 근데 탱자는 와 예?"
"요새 너거 아부지가 하도 속도 안 좋고 피곤하다캐싸서 약술로 쪼매 담을라꼬 그란다 아이가."
"탱자 그기 몸에 그리 좋습니꺼?"
"기침하고 가래 끓는 데도 좋고, 두드래기(두드러기)에도 그만 아이가."


해마다 늦가을이면 어머니께서는 빈 소주 대병에 잘 익은 탱자를 넣고 소주를 약간 부은 뒤 마개를 막아 촛농으로 붙였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아버지 밥그릇 옆에 마치 숭늉처럼 노란 탱자술을 한 대접씩 올렸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탱자술부터 한잔 쭉 드신 뒤 밥숟가락을 드셨다.

▲ 유자의 먼 사촌 탱자
ⓒ2004 이종찬

▲ 아나? 이기 뭐꼬? 탱자 아이가
ⓒ2004 이종찬
어머니께서는 간혹 우리 형제들이 트림을 끄윽~끅 하거나 배가 아프다고 할 때에도 아버지께서 드시는 그 탱자술을 조금 마시게 했다. 그러면 금세 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끔뜨끔하다가 조금 지나면 정말 신기하게도 트림과 배앓이가 사라지곤 했다. 특히 감기에 걸렸을 때 어머니께서 탱자 껍질을 우려낸 뜨거운 물을 몇 번 마시고 나면 이내 감기가 뚝 떨어졌다.

"아나!"
"이기 뭐꼬? 탱자 아이가. 근데 탱자가 와 이리 크노?"
"문디 머스마야! 니 눈에는 그기 탱자로 비나?(보이나) 개눈에는 똥빼이(똥밖에) 안 빈다(보인다)카더마는."
"그라모 이기 뭐꼬?"
"감귤이다. 울 옴마가 제주도에 해치(들놀이) 갔다가 사 온 기다."


해마다 가을이 깊어갈 때면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에 보석처럼 콕콕 박힌 노란 탱자가 못 견디게 그립다. 툭 하면 삐죽이 토라져 탱자나무 가시처럼 내 마음을 콕콕 찔러놓던 그 가시나, 툭 하면 볼우물 살포시 피우며 향긋한 탱자향으로 다가오던 그 가시나에게 노랗게 잘 익은 탱자 몇 알 건네고 싶다.

▲ 내 어린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탱자
ⓒ2004 이종찬

2004/11/04 오후 3:42
ⓒ 2004 Ohmy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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