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국에는 불행한 사람 천지다.

세상사는얘기/다산함께읽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7. 9. 23. 22:57

본문

728x90
인터넷냉장고와 명절, 여성은 행복한가
[하재근 칼럼] 한국엔 불행한 사람들 천지, 나눔과 연대의 지혜 필요
 
하재근
 
냉장고의 시대다. 삼성, 금성의 새 하얀색 냉장고는 가고 지펠, 하우젠의 총천연색 문짝 두 개 짜리 냉장고가 육박하고 있다. 삼성, 금성 냉장고는 생필품이었지만 문짝 두 개 짜리 냉장고는 삶의 질 그 자체다. 문짝 두 개 짜리 냉장고는 "여자라서 행복하게" 만든다.
 
인터넷 냉장고 광고까지 봤다.(실물을 보진 못했다) 점입가경 설상가상이다. 세계와 단절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사회적 퇴행을 겪어야 하는 여자를 위한 아이템이다. 주방 냉장고 문짝에 달린 인터넷 엘시디 창은 주방에서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이 문을 열어 여자는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세계와 소통한다. 여자라서 행복할까?
 
여자는 어릴 때부터 개체를 뛰어 넘는 보편을 사유하지 않도록 훈육 받는다. 여성에게 세계는 그 가족일 뿐이어야 한다. 어려선 아비를, 자라선 남편을, 늙어선 자식을 따른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그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여성이 삼종지도의 덕을 지키며 가정이라는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을 상징하는 공간이 부엌이다.
 
인터넷 냉장고는 부엌에 가상의 네트워크를 연결함으로서 여성의 현실적 고립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허구를 통해서나마 바깥세상과 접속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줌으로서 물리적인 문을 박차고 나갈 의지를 거세하는 욕망의 유사 충족물 쯤이라고나 할까? 
 
▲문짝 두 개를 넘어 인터넷까지 장착된 최첨단 인터넷냉장고. 여성의 편의를 강조한 것이 아닌 여성을 부억이라는 공간에 가둬놓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 LG전자
'문짝 두 개 짜리 인터넷 냉장고'는 사회적 욕망이 조직적으로 거세된 존재인 여성을 한 번 더 거세하는 아버지의 칼이다. 삼성의 지펠 냉장고. ‘여자라서 행복해요.’ 가부장이 딸에게 명령하는 결핍. ‘넌 이 냉장고를 욕망하라. 그리고 소유하고 행복하라.’

 
애초에 욕망은 자유분방한 것이나 자본주의 질서에서는 욕망까지 명령받는다. 조작된 결핍. '문짝 두 개 짜리 인터넷 냉장고'를 욕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자본의 명령을 받는 순간 결핍이 생겨난다. 그리고 거기까지. 결핍의 충족이라는 환상과 함께 여성은 부엌에서 유사 행복을 느끼면서 감금에 순응해야 한다.
 
'문짝 두 개 짜리 인터넷 냉장고' CF 이미지는 자본의 이윤과 가부장적 사회질서의 안락을 위해 여성을 부엌에 가두는 ‘지옥의 문’처럼 느껴진다. 분명한 건 '문짝 두 개 짜리 인터넷 냉장고'로 충족되는 결핍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조작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망상이 바로 자본과 사회가 우리 머리 속에 시공해 놓은 진짜 ‘지옥의 문’일 게다.
 
옛날에 다른 주제로 썼던 글에서 여성에 대한 부분만 발췌하고 손을 좀 봤다. 추석을 맞아 문득 이 글이 떠올랐다. 민족의 대명절인 연휴기간 동안 한국 여성들은 부엌과 거실, 안방 사이에 있는 ‘지옥의 문’에 갇혀 냉장고와 조리장치와 밥상, 싱크대를 벗하며 지낸다. 여성에겐 명절도 ‘지옥의 문’이다. 종갓집 며느리에겐 제사도 ‘지옥의 문’이다.
 
얼마 전에 경상도 양동마을에 있는 수백 년 된 고택을 찾았었다. 대청마루 위에 각종 상들이 이층으로 쌓여 있었다. 그 상들은 제사 때 쓰이는 물건이라고 한다. 시원하게 한담을 나누는 대청마루 위에 며느리의 ‘지옥’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상들은 이번 추석 때 모두 대청마루로 내려왔을 것이다.
 
한국 여성이 직업을 가지는 이유 1순위가 자식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서다. 본인의 자아실현이 아니다. 강남 전업주부도 자식 사교육 코치 노릇을 하느라 본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 여성은 도처에서 매여 지낸다. 그러면서 부엌을 수호해야 한다. 또 명절을 사수해야 한다. TV에서는 문짝 두 개 짜리 냉장고를 보여주며 이것만 있으면 ‘여자라서 행복하다’도 화사하게 말한다.
 
그런데 딱히 여자만 불행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엔 불행한 사람들 천지다. 말하자면 여성을 비롯해 비정규직 노동자라든가 각종 약자 집단을 따로 따로 ‘지옥의 문‘에 가둬 배제하는 사이에 나라 전체가 ’지옥‘으로 화하고 있는 것 같다. 나눔과 연대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명절 부엌 설거지 연대부터 실행하는 것도 좋겠다.

 

* 문화평론가,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

 

명절, 남자들만 먼저 밥먹는 것은 권력
[기고] 호주제 폐지, 가정 내에서 양성평등 실현해 명절증후군 없애야
 
고은광순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가 처의 부에 대한 수동적? 종속적 관계를 정착시키므로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여성을 남성 가의 유지와 계승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취급하는 호주제를 더 이상 존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3월 2일 국회는 호주제를 규정한 민법을 폐지했다. 물론 바뀐 신분등록으로 전산화 작업이 모두 끝나는 2008년에야 비로소 실감이 나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브라보!
 
호주제가 폐지되면 대체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림할아버지들이 주장하시듯 콩가루 집안이 되고 근친상간이 일어날까? 이혼이 조장되고 아이들이 버려질까?
 
헌법재판소가 옳지 않다고 지적한 것을 두 가지로 꼭 집어 말하면 부가입적(夫家入籍)과 부가입적(父家入籍)이다. 아내가 결혼하면서 남편, 혹은 시아버지에게 입적하는 것은 잘못 되었으며,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버지에게만 입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호주제 폐지 이후의 신분등록에는 어떻게 기록이 되나?
 
현재 대법원, 법무부, 여성부가 합의를 본 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고 부모, 배우자, 자녀를 추가로 기록하는 방식이므로 출생부터 사망까지 한 장의 기록으로 해결된다. 지금의 호적처럼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 본인의 결혼, 배우자의 사망이나 이혼, 자녀의 출가 등에 따라 호적에 입적하고 출적하여 새로 만드는 번거로운 과정이 생략되며 다른 가족의 신분행위(결혼, 이혼, 사망 등)의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게된다.

부계 모계를 통털어 8촌까지 관계가 전산으로 걸러지게 될 것이므로 부계혈통만 따져왔던 현재의 어설픈 근친상간 금지보다 훨씬 실질적인 근친결혼이 예방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를 기록할 뿐 아버지 호적에 소속시킬 필요도 없고, 결혼을 하면 배우자를 기록할 뿐 남편이나 시아버지의 호적에 끌어다 넣어 남자집안의 일원이라고 우길 이유가 없다. 물론 서류상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서류상의 변화는 실제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현재의 남성중심의 전통문화(혈연, 가문, 종중)는 엄청난 가속도로 양성평등의 새로운 전통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유림할아버지들이 제일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 터인데, 이것은 그간 여성을 남성을 위한 이등인간으로 못 박아 놓고서야 누릴 수 있었던 권력(?)이었으므로 이제는 새롭게 진화되는 세상을 위해 그만 마음을 비우시기를 부탁드린다.
 
한편으로는 혼인하면 ‘남의 식구’가 된다고 서운해 했던 딸이 ‘남의 식구’가 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신세대의 엄마아빠들이라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명절에 아들, 며느리를 모두 불러들이는 우리나라의 전통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나라처럼 일사 분란하게 남자집안 중심으로 가족의 대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외국처럼 합의해서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면 ‘명절 증후군’을 호소하면서 부부간에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없다. 상호존중과 상호배려의 미덕이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면 왜 호주제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이혼율이 증가하고 아이들이 버려지고 콩가루 집안이 되랴.
 
새로운 신분등기로 인해 아내가 결혼 후 남편집안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며느리의 노동을 강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치렀던 집안의 대소사는 대폭 줄어들거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죽은 자보다 살아있는 자의 행복을 위하여 알토란같이 진화된 문화를 먼저 만들어내는 사람이 생명을 가진 동안 더 많은 환희를 맛보게 되지 않을까?
 
명절연휴 하루 전날, 한의원에는 유난히 많은 며느리들이 침을 맞으러 찾아왔다. 손목이 아픈 며느리, 어깨가 아프다는 며느리, 여행후 설사 복통을 얻었다는 며느리... 그들은 모두 '일 해야 하는데 큰 일 났다'며 공통적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떤 남편은 아내에게 일 하기 싫어 자해한 것이 아니냐고 웃으며 묻더란다.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일 하기 싫어 자해할거면 손목을 부러뜨리지 이 정도로 하겠어?"
 
그러나 정작 명절이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강도 높은 육체노동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남자 집안'이 일차적 중심이 되는 지독한 남자중심의 차례, 친인척 관계 속에서 잠시라도 '복무'하도록 강제하는 문화가 여성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남자들만 먼저 식사를 마치고, 우루루 다 떠나버린 그 자리에 여자들이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여자들 또한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밥을 먹지 않았던가...라고 생각했던 남성들이라면 올 추석엔 가만히 관찰해보라.
 
남자들이 떠난 지저분한 밥상에 여자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웃으며 밥을 먹는 것 같아도, 그들 속에는 이미 그런 문화를 참을 수 없어 속에 분노를 삭히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실감이 안 난다고? 그게 뭐 기분나쁜 일이냐고?
 
그렇다면 상황을 바꾸어 생각해 보라. 명절에는 여자 집으로 먼저 모여, 여자의 조상을 위해 음식을 차린 뒤, 여자들이 음식을 먼저 먹고 떠난 자리에 남자들끼리 앉아서 먹으라고 한다면? 그러면 비로소 음식 먹는 순서 하나에도 '권력'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그러한 권력의 주종관계가 일방적으로,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드러나는 문화 속에서 일방적으로 열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느냐고?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끝에 얻어낼 것은 당신의 몫이다. ^^
 
10월 3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인사동문화거리에서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제3회 대한민국여성축제가 펼쳐진다. ‘광복60년 여성해방 원년’을 기념하는 이번 축제에서 해방된 남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 필자는 양성평등에 힘쓰는 한의사입니다.

 

 

남성자손의 축제에 들러리선 며느리들
[정문순 칼럼] 여성들만 소외시키는 가부장적 가족제도 이젠 변모해야
 
정문순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맘때가 반갑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여자들에게 가을 들머리는 명절을 준비해야 하는 때이다. 고향의 부모가 그리워도 차마 빈손으로 집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명절을 앞둔 이맘때면 언론에 단골로 비치는 메뉴들이다.
 
그러나 세상의 인심은 가계에 주름진 사람들에게만 후할 뿐 명절 때문에 마음에 주름진 여자들에게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명절이 여자를 피곤하게 한다고 말하면 막중한 노동력이 요구되는 제사 준비가 떠오를 것이다. 연전에 여성단체에서는 남편을 비롯한 시댁의 남자 식구들을 제사상 차리는 데 참여시키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나의 경우 상차림이 좀 더 간소해지고 남편과 역할을 나눈다면 제사 지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여성들의 희생은 여전히 잔재

생전의 고인을 추억하는 자리가 될 수 있고, 죽은 이를 위해 산 자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제사라는 생각에 미치면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면 이승에 없는 이를 위해 음식을 차리는 건 한결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착한 생각은 여기까지. 지금의 제사 문화에서는 결코 조상이 주인공이라 할 수 없으니 문제다.

명절날 여자들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하는데 남자들과 아이들은 배 두드리며 먹고 노느라 피곤한 풍경은 가족 관계에서 말석에 위치한 며느리의 위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혼한 여자에게 남편의 가족들은 그다지 편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며느리는 가족이되 아직 가족이 아니다. 가족이라면 염치나 체면은 굳이 차릴 필요가 없다. 의무만 있지 발언권이 없다면 당당한 가족 구성원일 수 없다. 며느리에게 시댁은 구석구석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지 발 뻗고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허드렛일과 뒤치다꺼리는 자신의 몫일 뿐 나이어린 시동생, 시누이마저 상전으로 대접해 주어야 한다. 남편의 일가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잘못한 것이 없어도 미안해야 할 때가 많다. 몸가짐은 언제나 조신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다소곳하게 있어도 안된다. 적당히 어울릴 줄 알아야 하지만 너무 나서는 것도 책잡힌다. 이런 고난도의 역할에 적응하려면 뼈를 깎는 훈련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내 육신을 만들어준 선대의 제사는 모시지 않아도 되지만 얼굴도 본 적 없는 남편의 조상신은 섬겨야 하고, 떳떳한 가족의 일원 대접도 받지 못하면서 남편 일가를 곡진히 모셔야 하는 불합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려면 얼마만한 고난과 수행이 필요한 것일까. 이 과정을 통과한 여성이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가부장 가족 제도 이젠 변모해야

우리 어머니들이 겪어온 삶의 내력이 그랬다. 그러나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싫은 내색도 할 수 없는 삶을 강제당한 며느리의 내면은 어느새 독한 시어머니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그만한 노력을 가족에 쏟지 말고 사회를 위해 기울였다면 큰일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자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 가족 제도는 여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명절만 되면 이유 없이 몸이 아프다고 하는 여자들이 왜 나오겠는가.

생활양식의 변화로 가족제도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지만 여전히 여성의 희생을 밑천으로 삼는 가족 구도가 건재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명절에 있다. 멀리 있어도 명절이면 일가가 떠들썩하게 모여 치르는 제사는 부계 혈통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계승을 다짐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열 몇 시간 꼼짝 없이 막히는 길이라도 남자들에겐 고향길이 즐겁겠지만 일상의 교란과 초인적인 자기 절제가 요구되는 명절이 여자들에게 달가울 리 없다. 여성의 소외를 대가로 한 남성 자손의 축제로 명절이 변질될 바에야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평범한 여자들에게 언제까지 초인의 역할을 요구해야 하는가.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관련기사
명절, 남자들만 먼저 밥먹는 것은 권력
 
* 필자는 <대자보> 편집위원이며, 문학평론가입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