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두해 전 멸치국물에다 된장을 풀어 끓어낸, 마치 배춧국과 같은 담백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선천성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나 몸놀림이 원만치 못합니다. 학교라곤 초등학교를 다녔던 게 전부. 그러나, 그는 풀꽃 같은 시를 쓰고 있습니다. 시심(詩心)이 너그럽고 따뜻합니다.
하루 동안 그가 나다닐 수 있는 세상은 넓지 않습니다. 가족 모두 생업에 쫓겨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조그맣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해가 뜨고, 구름이 끼고, 다시 구름에 가린 해가 나올 때까지 어찌나 눈 조아리고 있는지 펼쳐진 모든 세상이 그의 눈 속에 다 담깁니다.
그런 그를 문학회에서 만났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뜸해졌습니다. 내가 사족(蛇足)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삶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말에요.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흐릅니다. 그런 가운데,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만큼 섭섭한 게 또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단 한번도 내게 불만을 띄우지 않습니다. 기다림을 사랑한 때문일까요?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원고뭉치를 정리하다가 어눌하게 눌러쓴 그의 원고를 발견했습니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었습니다. 어찌 사는지. 몸은 아프지 않은지. 이사라도 갔나? 여러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요즘 사람들처럼 그 흔한 손전화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 얼굴을 맞대지 않는 한 그와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언젠가 전화 하나쯤은 들여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더니 아예 말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그는 인터넷은커녕 휴대폰 이메일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정보통신이 난무하는 세상에도 개의치 않고 삽니다. 그가 별난 사람일까요?
하지만 그는 갓 끓여낸 배춧국처럼 담백합니다. 이것저것 꾸며 살지 않습니다. 소탈합니다. 많이 가지려고 아득바득 데는 보통의 삶으로는 결코 따라 살지 못합니다. 그런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방랑시인 김삿갓처럼 불쑥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얼굴빛이 참 좋았습니다. 반나절을 그간의 세상사를 나누고도 시간이 아쉬웠습니다. 그가 떠나면서 닳고 헤어져 손때 묻은 공책을 권내 주었습니다. 하나하나 챙겨보니 여름 내내 그가 몸담았던 세상이 다 담겨있었습니다. 시상하나마다 그가 휘돌아 다녔던 곳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수더분한 처음으로 낯선 곳을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꼈던 그의 세상이 와락 다가들었습니다. 어눌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그의 체취가 묻어나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번 만행을 통해 그는 수도자적 결심을 다졌나봅니다. 시편에서 드러난 그의 심성토로는 내면에 안주하고 있는 털털함과 또 달랐습니다. 현재 곁으로 드러난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민, 참혹함과 비열함을 다 겪은 듯 치열함을 가졌습니다. 그의 삶에 새로운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이는 싯달다가 높다란 궁성에 갇혀 살면서 인간이면 마땅히 겪어야할 생로병사를 모른 채 살다가 서른 나이를 넘기고 궁 밖에 나가 보았을 때 충격적인 세상과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세상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불편한 몸을 한하며 현재, 여기의 세상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 세상 일 있는 그대로 챙겨보았다는데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습작노트를 통해 ‘평생 시 같은 시를 쓰지 않고 습작만 하면서 살겠다.’는 결연한 삶의 태도를 새롭게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빛바랜 시작노트에는 어느 시 한편도 완성된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내게 문자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놀라웠습니다. 평생 문명이기와는 담을 쌓고 지내려나싶었는데, 인터넷 속으로 그가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의 삶에 변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때문에 이제 그와 나는 무시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 그는 컴퓨터 앞에서 붙박여 산다고 합니다. 새로이 만난 세상이 그의 삶의 의미를 진중하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가 담임 맡고 있는 아이들과 만나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더 이상 바깥에 나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언제 날 잡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언제라도 좋다고 답신을 보냈더니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바람처럼 찾겠노라고,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 시나브로 만나면 어떻겠냐고 되레 너스레를 떱니다. 하지만 아직 그는 자기와 동감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높은 담을 쌓고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도 마찬가집니다. 장애란 단지 불편할 따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은가 봅니다. 세상은 혼자만의 각질을 벗고 났을 때 더 달리 보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그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놓고 싶지만,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애써 외면했던 인터넷도 마음을 여니까 저렇게 쉽사리 다가드는 데, 휴대폰이 들리는 날도 그렇게 멀지 않았다고 자신합니다. 사람은 얼굴을 부대끼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배려할 수 있는 여력을 넓혀 갑니다. 그가 스스로의 처지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세상 빛을 혼자 거닐 때까지 기다리렵니다.
그는 내가 끓여주는 배춧국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 가을, 멸치국물 우려내어 된장 솔솔 풀어 담백한 배춧국을 끓여놓고 그를 초대해야겠습니다. 오늘도 그가 보고 싶습니다, 하얀 덧니가 인상적인 배시시한 웃음과 함께.
<한빛소리>, 147호, 2008년 9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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