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가 살아 지천으로 날아다니는 세상이라면
바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반딧불이는 ‘반디’, ‘반딧불’, ‘개똥벌레’ 등 지방마다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개똥’자가 많이 들어가는 데, ‘개똥’이란 흔한 것을 이르던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반딧불이가 너무 흔했기 때문에 ‘개똥벌레’라고 불렀을 거라 생각됩니다.
반딧불이는 스스로 빛을 내는 희귀한 정서곤충이었습니다. 최근 들어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됨에 따라 그 수가 점차 줄어들어 마침내는 깨끗한 환경을 가늠하는 지표곤충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태어나 줄곧 도회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 반딧불이에 대한 추억은 까마득하겠지만,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았던 중장년층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빛을 내는 반딧불이의 꽁무니를 떼어내어 이마나 모자에 붙이고 다니며 장난을 쳤던 어슴푸레한 기억이 있습니다.
▲ '추억 속 곤충' 된 반딧불이야, 다시 돌아와,
<반딧불이 통신> 한영식 글|홍승우 그림|사이언스북스
이렇듯 반딧불이하면 아련한 옛 추억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게 하지만, 그런 반딧불이가 요즘은 높이 솟은 아파트와 가로등 불빛에 내몰려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보다 더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뿌려대는 농약과 잡다한 오폐수에 의해 살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무더운 여름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모습으로 신비스러움을 자아내던 ‘반딧불이’, 1급수의 깨끗한 계곡물에서만 자라는 청정 환경의 대명사 ‘반딧불이’, 이제는 단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고사성어로만 남게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반딧불이가 살 수 없는 세상은 인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들 좀 더 빨리 내달아 가겠다고 멀건 산을 깎아내고, 강을 돌렸으며, 물길을 막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개펄을 메우고, 농토를 갉아먹어댔습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우후죽순처럼 서 있는 아파트 덩어리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20세기 자본주의 최고의 개발품인 아파트먼트(Apartment)가 농촌의 평화스런 경치를 깡그리 해치고 있습니다. 물론 빠듯한 주택난에 어쩔 수 없는 처방전이라지만, 이 또한 자연의 섭리를 크게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금수강산’에서 의좋게 뛰놀았던 산짐승들이 산허리가 생뚱맞게 잘려나간 도로 곳곳에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어 가슴이 아픕니다. 지난 세월 동안 인간들은 오직 제 자신만 편하고 행복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에 거침없이 ‘자연파괴’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자연은 그 터전을 약탈당했습니다.
어느 스님의 법문 중에 쓰레기를 만드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랍니다. 날마다 되풀이해서 사용하는 생활용품들을 생각해 보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먹고 마시며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샴푸, 린스, 무스, 비누, 치약, 각종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그 폐해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연의 어느 것 하나에만 치우쳐져 있지 않습니다. 자연의 정교한 균형이란 순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3천만 종의 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많은 생물들은 모두 하나하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여 그 어느 것 하나 순환과정에서 소외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하찮은 미생물 하나라도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주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써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명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편익만을 추구하는 동안 엄청난 자연파괴를 자행해 왔습니다. 마치 인간만이 이 지구상의 주인이라는 듯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문명이요 개발이겠지만 다른 생물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파괴입니다. 자연과 모든 생물들은 오직 인간만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하고, 인간은 이들을 언제나, 어떤 방법으로든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는 다른 어떤 종류의 생물과 다를 바 없고, 더구나 그들의 생명이나 우리 사람의 생명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은 관대한 것 같지만 무한정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학대하는 것만큼의 대가를 언젠가 우리 스스로가 치러야 합니다. 자연의 대재앙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해마다 지구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기상이변(가뭄과 홍수, 지진, 산불, 한파, 산성비)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출현,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기근과 흉작, 심각한 지구의 사막화, 오존층 파괴, 생물종의 멸종 등은 지구 생태계가 인간에게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는 벌써부터 전달되었습니다. 지구가 피부암에 걸렸습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옛 말씀을 되새겨야할 때입니다.
자연은 관대한 것 같지만 무한정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저지른 환경오염의 폐해는 막다른 벼랑에 다다라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생활현장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식탁에 오염된 쌀과 생선, 야채와 고기들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버린 폐수가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에게 오염을 안겨준다는 단순한 이치를 상기해 보세요. 자연의 재앙이 부메랑처럼 다가든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이미 물과 공기, 땅거죽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이 온통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환경오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일입니다.
그렇지만 환경문제는 큰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에 있고, 생활주변의 조그만 것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먼저 조금 덜 먹고, 덜 갖고, 쓰레기를 덜 만들며, 합성세제를 덜 쓰겠다는 노력에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어느 곳이든 자연을 훼손하고 개발하기에 앞서 개발의 목적과 기대효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예상되는 환경파괴와 그 부작용을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환경문제는 더 이상 정치적인 고려나 현실적 타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놓여날 때 아름답습니다.
더럽혀진 자연환경을 되돌려 놓은 방법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딧불이는 환경이 파괴된 곳에서는 여지없이 모습을 감춰버립니다. 반딧불이를 다시 살려내면 됩니다. 반딧불이가 살 수 없는 세상은 인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반딧불이가 살아 지천으로 날아다니는 세상이라면 바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한빛소리> 제159호 2009년 9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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