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할 수 있는 당당함
박종국(교사 수필가)
여우가 어슬렁어슬렁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문득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까마귀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까마귀는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한 덩어리 물고 있었다.
'흐음, 잘 됐다! 저 고기를 빼앗아 먹어야지.'
여우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까마귀님. 날씨가 참 좋지요?"
여우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까마귀는 멀뚱멀뚱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까마귀님은 정말 훌륭한 깃털을 가지셨군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보니, 윤기 흐르는 그 까만 깃털이 아주 멋져 보입니다 그려."
뜻밖에 여우의 칭찬을 들은 까마귀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그때, 여우가 다시 말했다.
"게다가 까마귀님께서는 노래 소리 또한 일품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 훌륭한 깃털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추셨다면 '새의 임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지요."
우쭐해진 까마귀는 자기의 노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큰소리로 노래했다.
"까옥, 까옥, 까옥!"
까마귀가 물고 있던 고깃덩어리는 말할 것도 없이 밑으로 떨어졌고, 까마귀가 목청껏 노래하고 있던 사이, 여우는 고깃덩이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이 우화를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물론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까마귀가 어리석다거나 여우의 꾀에 감탄하기도 하고, 까마귀를 속인 여우가 너무나 얄밉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유 없는 칭찬을 무작정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우물에 빠진 여우」,「사자와 당나귀」의 경우가 있습니다.
우물에 빠진 여우가 물을 마시러 온 염소에게 물맛이 아주 시원하다고 속여서 들어오게 하고 나서, 자기가 먼저 나간 다음에 염소를 끌어올려 주겠다고 하여 염소 어깨를 밟고 올라가서는 그냥 가 버립니다. 여기서도 여우는 '올라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들어오다니 어리석구나'하고 비웃으면서 사라집니다.
또한 사자가 당나귀의 빨리 달리는 능력을 이용하여 함께 사냥을 하자고 해서 많은 먹이를 잡은 뒤, 당나귀를 협박해서 쫓아 버리고 사냥감을 독차지해 버립니다. 이 이야기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가는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이솝이야기가 이 여우나 사자가 보여 준 교활한 꾀를 인정하면서 그 꾀에 속아 넘어가는 동물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으나, 남을 속이는 자들의 부도덕함을 지적하기보다는, 순진하게 남의 말을 믿었던 자들에게 정신 차릴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항상 남을 의심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안타까운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런 까닭에 현실에서는 여우와 같은 사람들이 '수완 좋다', '능력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을 속이고, 피해를 안겨 주며, 영악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편히 잘 사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각종 제품의 용량이나 성분을 속이는 것은 물론, 가짜 고춧가루나 가짜 참기름, 불량 제품을 만들어 건강을 해치는 양심 없는 생산자들도 많습니다. 부실 공사를 예사로 하는 건설업자나 부정부패한 짓을 밥 먹듯이 하는 공무원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속이는 치사한 사기꾼들도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까지 망치려 드는 뻔뻔한 정치인도 많은 세상이 됐습니다.
반면에, 전혀 남을 의심하지 않고, 남에게 도움을 주려다가 되레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빚보증을 서 주었다가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은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일도 예사로운 세상입니다. 잘 아는 사람들의 권유로 돈을 투자했다가 속아서 돈을 날린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함부로 믿었던 바로 그 사람에게 '못난이'니, '멍청이'니 하는 비난을 퍼부어 댑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솝이야기 한 편 한 편은 세상의 그릇된 일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우나 사자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남을 믿기보다는 의심할 것과, 남을 속여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현명한 것인 양 따르도록 이야기한다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건전한 생각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까마귀나 염소, 당나귀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애틋한 인간의 정을 나누고, 정정당당하게 '페어플레이'할 수 있는 그 당연함이 아쉽습니다.
진정 착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 올바른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그 무엇에도 비굴하지 않는 당당한 힘을 지녀야합니다. 착한 사람들이 힘을 지녔을 때만 나쁜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고, 부정한 사람들을 고발하고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까마귀와 염소, 당나귀같이 연약한 사람들도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까마귀와 염소, 당나귀의 편을 든다는 것도 문제는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사악한 상대에게 당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시는 속지 않을 비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더 이상 까마귀나 염소, 당나귀처럼 당하기만 하는 답답한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요즘은 따사로운 날씨 덕분에 또박또박 흙을 밟는 기분이 새롭습니다. 길섶에 피어 있는 앉은뱅이꽃이나 질경이를 만나거들랑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춰 들여다보세요. 때로 그 풀꽃에 꿀벌 한두 마리가 날아들면 그들의 분주함도 눈 여겨 보세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없듯이 대지는 모두가 사랑입니다.
/천안지역 장애인종합정보지 <한빛소리> 제 168호, 2010년 6월호 원고.
막무가내로 해도 좋은 말_박종국 (0) | 2010.08.02 |
---|---|
사랑을 고치는 명약은 없습니다 (0) | 2010.07.04 |
일일일찬(一日一讚) (0) | 2010.05.06 |
단지 외모단정이 채용조건이라면 (0) | 2010.04.04 |
주변의 자폐를 가진 장애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0) | 2010.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