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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한가?

한국작가회의/한빛소리원고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1. 4. 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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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의 글밭 2011-154]


장애인들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한가?

 

박 종 국


지금 우리사회는 장애인들이 어떤 일에 불편해 하고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얼마나 관심 갖고 있을까. 그다지 따뜻한 더듬이를 갖고 있지 않을 뿐더러 편견과 몰이해로 장애인을 대하는 눈초리가 여전히 차갑다. 필자가 사는 지역에 있는 장애인 학교는 주민들의 반대로 시내에서 멀찍이 내몰려 있다. 근시안적인 사고의 결과다. 언젠가 ‘나’ 자신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교통사고만 당해도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수년에 걸친 경기침체로 사는 형편이 팍팍해졌다. 그에 따라 장애인들은 높은 실업률과 저임금, 자영업 중심의 취업환경에 힘겹다. 이미 실시되고 있는 장애인 자활자립을 위한 교육도 기업 참여나 현장자원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무료IT 교육과정이나 포토샵, 플래시, 드림위버 등 각종 정보프로그램의 고급 활용기법, 웹 디자인, 자바개발, 모바일 콘텐츠, 닷넷 프로그램, 전문IT교육과정 등은 그나마 장애인 정보화 격차해소와 성공적인 사회적응을 돕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애인들은 아직 밋밋한 수치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대한 교육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장애인들의 성공적인 사회적응을 돕기 위한 활동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자활을 돕고, 자립기반을 마련하는 활동이 우선이어야 한다. 더구나 요즘과 같은 세상에 장애인 정보 격차해소에 보다 치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장애인도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가름 짓고 우열을 가리는 사람들이 진짜 장애인이다. 단지 신체의 장애가 있다고 해서 불편부당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안타깝다. 당장에 거리를 나서 보면 공공시설은 물론, 각종 교통시설과 문화·교육·체육시설을 열악하기 그지없다. 수많은 이 땅의 장애인들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 장애인들도 더 이상 장애인으로서 딱한 처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하겠다는 자활의지로 맞서야한다. 그 중심에는 재활 패러다임보다는 자립 패러다임 의식이 서 있어야한다.


아이들 눈에 장애인은 어떠한 모습으로 비칠까? 어둡고, 우울하며, 쓸쓸하고, 불쌍한 모습이다. 안 됐다는, 도와주어야겠다는 동정심이 대부분이다. 평소 장애인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탓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이다. 불과 열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장애인의 모습이 어른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편견 그 자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더불어 살기가 절실한 때다.


장애란 불편한 것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결국,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그들의 동정하거나 시혜적인 차원으로 그저 도와주고, 시설물을 하나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인식 변화로 장애인들과 사회를 공유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단순히 특혜를 주기보다는 동등한 권리를 나누어 가져야한다. 그것이 바로 장애인들이 불편함 없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시발점이다.


그 동안 이 땅의 장애인들은 단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핍박을 당하거나 소외받으며 살아야한다. 그 이유는 하나다. 경제성장일변도의 천민자본주의의 편승한 물질물량주의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강자인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급급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만 난무하고 배려는 없었다는 얘기다.


비단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인 조치는 장애인들의 자활의지를 깡그리 망치게 하는 행위다. 그러한 처사는 장애인들을 두 번 죽이는 폭거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푸대접하였지만 당장에 필요한 것은 장애인 사회를 대하는 진정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도 신뢰를 저버린 시행착오는 비일비재하다. 매년 장애인의 날을 맞아 마련했던 전시성 관제체육행사가 그러했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장애인이동권이나 교육권, 중증 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인 서비스,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등에서 이 땅의 장애인들은 늘 따로국밥이었다. 장애인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권고한 ‘차별금지법’ 마저 축소되거나 거부당하고, 종국에는 장애인 비하발언까지 들어야하는 낭패로, 삶에 대한 희망마저 짓밟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논리에 비약이 심한 측면도 있지만 그 동안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게 장애인을 배려하는 사회공적시설이 늘어났다.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거나 시각장애자를 위한 보행도로, 일반시내버스 노선에 저상버스를 배치하고, 장애인 콜택시 도입하는 등 교통 약자들을 위한 이동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시설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특수교육발전 5개년 계획에 따른 수정안과 장애인 교육예산 증액 성과는 장애인들도 일반인들과 동등하게 처신하며, 생활하고, 교육받을 수 있다는 의지를 일깨워주는 세심한 배려다.


그러나 아직도 충분한 나눔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시혜적 차원의 거저 퍼주기가 아니라, 장애인들도 국민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 더불어 학교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바람직한 장애인 차별에 관한 교육이 절실하다. 또한 양성평등교육 차원에서 장애인의 삶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하고, 사회적인 약자인 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살아나가기 위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과 함께 나누는 아름다움이다


이 시대는 아름답고 건강한 몸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렇지 못한 몸의 극단에 장애인이 있다. 유약한 몸, 병에 걸린 몸, 추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몸, 가난에 찌든 몸. 그러한 몸을 가진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그 모든 낙인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뒤따라야한다. 장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에 찬 삶의 태도를 진작해야 한다. 이제 장애인 모두는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고 뜨거운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했으면 좋겠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모욕과 시선에도 항상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때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소망한다, 금지된 것을. 이제부터 이 땅의 모든 장애인들이 야한 장애인, 뜨거운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장애차별 철폐를 위해 외쳤던 그 함성들만큼 세상을 애써 사랑하고, 미약한 존재로서 세상에서 자신을 숨겨야 했던 그 순간순간들에서 탈탈 털고 일어나 뜨거운 존재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들은 그럴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획득한 자만이 야한 장애인이요, 뜨거운 인간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자만이 그 권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다. 하지만 이 땅의 장애인들은 이날을 장애인차별철폐 날로 부른다. 왜냐하면 해마다 장애인들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몇 가지를 요구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실히 달라진 장애인 인권에 대한 시각은 누가 뭐래도 장애인 당사자 스스로 얻어낸 것이다. 불과 수년 전에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역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사회는 장애인의 권리보장 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올해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생색내기용 행사를 진행할 것이다. 언제까지 그런 행사를 진행하려는지…. 아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장애인들이 권리보장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장애인들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한가?


/천안지역 장애인종합정보지 <한빛소리> 제 178호, 2011년 4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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