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우리의 재난안전시스템은 국민적 신뢰가 가능한가?

한국작가회의/한빛소리원고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1. 5. 5. 21:24

본문

박종국의 글밭 2011-166

 

우리의 재난안전시스템은 국민적 신뢰가 가능한가?

박 종 국

 

세월 빠르다. 실로 엄청난 일이 후딱 지나쳐 버렸다. 바삐 사는 탓에 그만큼 망각곡선도 느슨해졌다. 일본 동북대지진 참사가 오래된 기억 같다. 마음이 멀어지면 생각도 무뎌지는 것일까. 우리 언론은 마치 연일 특집생방송을 편성하여 처절한 참사 현장을 실시간 보도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의 삶이 그대로 투영됐다. 그 여파는 컸다. 전국적으로 온정의 손길이 봇물 터졌다. 반일 감정이 극도로 차달았던 시민단체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일본을 돕자는 성금운동에 대다수 국민이 선뜻 공감했다. 그게 우리의 온유한 심성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본 대지진 참사는 크게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 하나는 일본인의 질서의식이다. 삶의 터전이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그들은 '모범생'이었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재앙 속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부조리와 비행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진 피해지역 주민들은 한겨울처럼 추운 날씨에 난방용 석유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도 정부가 나눠주는 석유를 받기 위해 호리병박 모양으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차분하게 비춰졌다.

 

특히, 대형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동북부 해안 곳곳에 급히 마련된 대피소를 메운 일본인들은 인내와 이해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담요를 둘로 찢어 나눠 쓰는 사람들, 식수를 사기 위해 배급소 앞에 불평 하나 없이 수백 미터를 줄지어 선 사람들, 먼저 왔다고 욕심내지 않고 뒷사람을 위해 자기 먹을 분량만큼만 라면과 주먹밥을 사는 사람들……. 그들은 고립된 상태에서도 어느 한 사람도 "나부터 구해 달라"고 난리를 치지 않았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흔히 지진해일의 대참사가 일어나면 약탈과 폭행으로 무법천지가 된다.

 

이처럼 엄청난 피해규모와 달리 일본 사람들은 무섭도록 냉정하고 침착했다. 재해를 당한 일본인들이 크게 흐느끼거나 울부짖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폐가 된다’는 배려정신 때문이다. 쓰나미로 가옥과 차량 등이 쓸려 내려가는 장면이 텔레비전에서 자주 비춰졌지만 어느 채널에서도 쓰나미에 휩쓸리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우리나라에 일본 경우처럼 대지진 참사가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국민들의 대처 모습과 텔레비전 채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일본과 한국의 보도 자세는 판이하다. 한국의 텔레비전은 시청률을 높이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더 선정적이고 더 비참한 모습을 경쟁적으로 보여주었을 것이다(한국 언론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한데도 우리의 재난 보도가 뜨악하게 생각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재난 상황보다 희생자를 취재하는 게 다반사다. 시신이 안치된 빈소와 병원의 모습이 시시각각 비춰진다. 그러나 이번 일본 대지진 보도에서 일본 언론은 달랐다. 일본 언론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충격을 드러내지 않고 사실 전달에 주력한다. 무슨 일이 터지면 목청을 높이고 흥분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총동원하는 우리네 방송과 많이 다르다. 이번 대지진 속에서 자극적인 표현과 사망자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일본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일본 방송을 그대로 받아 중계하는 우리 방송들이 더 흥분하고 표현도 더 자극적이었다). 이런 일본 언론의 모습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는 이재민들을 안심시키고 서로를 믿게 하는 또 다른 치유제로 작용했다.

 

쓰나미로 가옥과 차량이 쓸려 내려가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자주 비쳐지지만 어느 채널에서도 쓰나미에 휩쓸리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이도 이 세상에 남는다’는 일본인의 특유한 사생(死生)관 때문이지만 울부짖거나 흐느끼는 모습도 좀처럼 화면에서 보기 힘들었다. 그게 일본인이다. 일본 언론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충격을 드러내지 않고 사실 전달에 주력한다. 무슨 일이 터지면 목청을 높이고 흥분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총동원하는 우리네 방송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번 참사를 통해서 볼 때 일본인들이 보여 준 '메이와쿠(迷惑)'와 '세와(世話)'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는 문서상 판에 박힌 원칙적·도식적 관료 행정으로 이재민들의 발목을 잡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미증유의 위급사태에 직관과 판단에 의한 정책 결정과 행동을 수반하는 융통성 있는 위기관리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이 정교하게 잘 마련했다는 매뉴얼 행정, 시스템 행정도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위난 대응에 지리멸렬한 한계를 보이는 것이 선진국 일본의 이중성이다. 일본 대지진참사를 반면교사로 삼을 때 우리의 국가차원의 재난 안전시스템은 어느 정도일까. 국민적 신뢰가 가능한 것일까.

 

어쨌거나 일본인들은 그 끔찍한 재앙에도 냉혹하리만큼 차분한 대응과 침착함, 그리고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국제사회는 이를 인류의 정신적 진보 내지 진화라고까지 극찬하였다. 일본인들의 돋보이는 예의·침착·질서는 그들 민족이 어릴 때부터 반복해온 교육의 효과로서 우수한 교양적 자질임에는 틀림없다. 많은 논객들이 '메이와쿠(迷惑)'와 '세와(世話)'를 거론했다. '메이와쿠'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아이들이 아침에 학교에 갈 때 부모는 버릇처럼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당부한다. 그것이 어느새 생활관습이자 관행이 돼버렸으니, 어떤 위기, 어떤 절박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가 저절로 나온 것이다. '세와'는 남에게 베풀기는 하되 신세 지지는 말라는 가르침이다.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일본인들은 개인은 가난해도 국가는 부자이기를 바라며 많은 세금을 불평 없이 내는 일본인 정신도 세와에서 나온다.

 

나는 일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지진참사 앞에서 침착하고, 인내하며, 배려하는 일본인들의 정신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게 내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문화와 난해한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이유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을 통해서 '국화'(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전쟁)을 숭상하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일본인, 그들이 무섭다. 2011. 05. 05.

 

/천안지역 장애인종합정보지 <한빛소리> 제 179호, 2011년 5월호 원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