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만 위한 목욕탕
박 종 국
어린시절, 그러니까 케케묵은 이야기다. 그때는 자주 목욕탕에 가지 못했다. 추석 설 명절을 제외하고는 목욕탕은 엄두도 못냈다. 아니,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시절 사람들이 몸을 씻는 데 불충했던 건 아니다. 여름철에 마을 앞 냇가에서 훌렁 벗은 채 묵은 때를 벗겼고, 우물가에서 등목도 했다. 그나마 호사를 부렸다면 쇠죽을 끓이고 나서 가마솥 한 가득 물을 붓고 거기 들어가 눅은 몸때를 씻었다.
지금 아이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게다. 지천으로 늘린 게 시설 좋은 목욕탕이고 사우나 찜질 방인데, 발가벗은 채 냇가에서, 다리 하나 뻗지 못하는 가마솥에 웅크린 채 목욕하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기야 요즘 대형 사우나에 가 보면 이건 숫제 목욕탕이 아니고 놀이터다. 유년의 기억에 목욕탕이라면 으레 때 빼고 광내는 곳으로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목욕은 우리 몸의 생체리듬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즉, 숱한 부대낌 속에서도 사우나 한번이면 그 모든 피로가 확 풀린다. 그러니 목욕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만큼 목욕은 괴죄죄한 마음을 말끔하게 해준다. 한데도 목욕탕을 들릴 때면 눈에 거슬리는 시빗거리가 종종 눈에 띤다. 제 혼자만 편하면 된다는 몰상식이 상례로 빚어진 결과다.
주말 목욕탕에 가면 고만고만한 또래아이들이 많다. 개중에는 아빠를 따라 못내 온 아이도 보이지만 끼리끼리 몰려온 아이들이 태반이다. 다들 몸을 씻으러 온 게 아니고 놀러온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목욕탕 가서 몸을 뽀득뽀득 씻고 오라고는 다그침은 오히려 고역이다.
아이들은 더운 물 찬물 가리지 않고 방방 뛰노는 자체가 즐겁다. 헌데,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자못 신경 거슬리는 어른이 많다. 아이들을 기가 죽게 하는 어른들을 보면 울컥 화가 솟구친다. 아이들은 뜨거운 물보다 미지근한 물, 저희들이 부담 없이 들어가고 쏘다닐 정도의 물을 원한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애꿎게도 아이들이 신명나게 노는 온탕에 들어가서는 뜨거운 물을 펑펑 튼다. 그러니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서 냅다 뛰쳐나간다. 아이들은 직접 대놓고 얘기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어른을 싫어한다. 그럴 요량이라면 열탕에 들어가도 될 텐데 고집스럽게 온탕에 들어와서 열탕보다 더 뜨겁게 만들어 놓는다. 여간한 놀부 심보가 아니다.
아이들은 볼멘소리를 한다.
“저런 아저씨들 때문에 목욕탕 가기 싫어요.”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아이들만도 못한 어른의 행위가 못내 아쉽다. 저러고도 어른 대접을 받고 싶을까. 뻔히 곁에 열탕을 두고도 아이들이 노는 온탕에 들어가서 뜨거운 물을 마구 틀고 아이들을 다 탕 밖으로 쫓아낸다. 그러고는, 혼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 마치 목욕탕을 전세 냈다는 듯한 행동을 하는 어른들, 정말 밥맛이다.
반대로 아이들이 온탕이 뜨거워 찬물을 틀면 물 식는다고 되레 야단을 친다. 이런 부류의 어른일수록 어른이 찬물을 틀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경우, 온탕이 지나치게 뜨거우면 너나 없이 찬물을 틀어서 온도를 낮춘다. 그럴 때 어느 누구도 그 어른이 찬물을 튼다고 나무라지 않는다. 이 또한 아이들이 목욕탕 가기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왜 어른들은 아이들이 찬물을 틀어 물 온도를 낮추면 찬물을 튼 아이들에게 “물 식는다. 찬물 감가라”고 꼭 한 마디씩 던질까.
목욕탕에서의 꼴불견 중 또 하나는, 사우나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와 몸을 씻지도 않은 채 냅다 냉탕에 들어가는 어른이다. 그러고도 냉탕에서 놀는 아이들을 다 밖으로 내쫓는다. 어느 사우나 목욕탕에 가도 냉탕은 그야말로 아이들 차지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냉탕에서 장난치고 노는 걸 그냥 두지 못한다. “그만 나가라”고 역정을 낸다. 그러고 찬물을 휘젓고 다니며 별난 운동치례를 한다. 꼴사납다. 이 또한 아이들이 목욕탕에서 싫어하는 어른들의 못난 모습이다.
사실 목욕탕에서 보면 생각 없는 어른들은 이미 탕 속에 물이 적정하게 찼는데도 온탕 열탕 냉탕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물이 탕 밖으로 철철 넘쳐흘러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찬물을 콸콸 틀어놓는다. 그 모습을 말 못하고 지켜보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더더욱 가관은 목욕탕을 관리하는 사람도 어른들의 경우는 하등에 나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눈치만 본다. 이 또한 아이들이 목욕탕에 가기 싫어하는 한 유형이다.
재밌게 놀다 냉탕에서 쫓겨난 아이들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하지만 나도 똑같은 어른으로 취급하는지 선뜻 말문을 열지 않았다. 볼이 많이 부었다. 이미 그들이나 나나 퉁퉁 불은 때를 아득바득 밀지 않은 채였다. 녀석들, 내 모습이 저희들 속내를 다독여 줄만한 사람으로 보였던지 “저기 보세요. 유엔에서 우리나라를 물 부족 국가라고 하는데, 저 아저씨는 물을 펑펑 쏟아내잖아요. 그래도 돼요?”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럴 때 쥐구멍이 필요한 걸까. 난 아이들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탕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아이들은 목욕탕을 나가버린 뒤였다. 그런데 웬걸 한쪽 샤워기를 독차지한 어른은 몸을 다 씻었는데도 그냥 털어놓고 발발거린다. 숫제 체조를 한다(이는 절대 어른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아니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나잇살이 많은 어른들일수록 심하다. “샤워기를 좀 잠그면 안 되겠느냐”고 이야기하면 "뭐, 내 돈 내고 목욕하는 네가 무슨 관섭이냐"는 투로 흘겨본다. 그보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바닥에 누워 마치 폭포수를 맞듯 떨어지는 물방울로 안마를 하는 어른들이다. 아이들이 아니라 정작 내가 열불이 돋았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고 살까.
여탕에서의 상황도 남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등 미는 기계나 앉은뱅이 의자, 물바가지 등 여럿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혼자서 차지하고 시나브로 사용하는 밉상스런 어른들이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쁜 처사는 목욕탕에서 아이들이 장난치고 노는 꼴을 그냥 못 봐주는 어른들, 그저 아이들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는 어른들이다. 아이들이 하는 짓을 사사건건 트집 잡아 지나치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어른들이 많다. 이런 어른들은 황당하게도 목욕탕에 온 아이들 전체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치고 다그친다.
아이들은 이야기한다. 시도 때도 없이 막무가내로 나무라는 어른들이 싫다고. 그래서 아이들은, “아이들만 들어가는 목욕탕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어른들이 없으면 뭐라고 나무라거나 혼내는 사람도 없고, 재밌고, 즐겁게 놀면서 목욕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지만 난 그런 아이들에게 조용히 타이른다. “그래도 어른 한 명 쯤은 같이 목욕해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아이들이 놀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도와 주지 않을까?” 내 말에 아이들은 십분 경청하며 공감했다.
물론 모든 어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한데도 목욕탕에 가면 온탕을 열탕보다 더 뜨겁게 만들고 아이들을 나무라는 어른이 많다. 아이들은 그냥 두어도 스스로 잘 해내는데.
ⓒ 박종국에세이칼럼 2017-20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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