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엄마는 같은 여자인데 왜 남자편일까?

박종국에세이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7. 7. 4. 15:26

본문

728x90

엄마는 같은 여자인데 왜 남자편일까?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베푼다

 


이 글은 우리 반에서 실시하는 '3분 스피치' 발표원고다. 그런데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이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더라도 선생님은 끝까지 다 읽어주실 거라 믿는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선생님은 내 마음을 헤아려 주실 테니까(이 글을 쓴 어린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   

 

나는 어른들이 싫다. 부모님은 물론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날마다 나의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하며, 싫증나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겪는 일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 

집에서는 엄마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야단이다.

똑같이 컴퓨터를 해도 오빠는 괜찮고 나한테는 여간 푸대접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이것해라 저것해라 시키면서 간식 하나에도 오빠랑 차별이 심하다.

나는 거의 오빠가 먹다 남긴 것 차지다. 그럴 땐 삼촌 말처럼 내가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 같이 생각된다.

나를 함부로 대하기는 아빠도 마찬가지다.

잔심부름을 모두 나한테만 시킨다. 실수로 조그만 잘못을 저지르면 오빠한테는 관대하면서도 나에게는 지나치리만큼 냉정하다.

계집애가 칠칠맞아서 그렇다고 야단을 친다. 아이가 그렇지 하면서 거들어주는 할머니 말씀이 고맙지만 소용없다.

나는 알고 있다.

삼대 째 외동아들로 태어난 아빠가 결혼 초부터 얼마나 아들을 원했는지를. 우리 집에서는 남자만이 대접을 받는다.

딸은 아무에게도 사랑받는 존재가 못 된다.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럴 때면 무척 섭섭하다.

 그런데 더욱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엄마다.

같은 여자인데 내게 왜 그럴까? 누구나 엄마가 되면 남자 편이 되는 걸까? 난 결혼해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아들이든 딸이든 공평하게 대할 것이다. 지금껏 차별받았던 게 너무 억울해서도 내 결심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나의 존재는 섭섭하다.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님들도 예쁘고,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게다가 잘 살거나 아빠엄마가 이름난 집 아들딸이면 그냥 지켜보기에도 역겨울 정도로 잘 해준다. 남들이 보기에 못생기고 꾀죄죄한 나는 그냥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꼬질이같은 존재다.

나는 초등학교를 입학한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

해마다 학기 초에 만나는 선생님은 대게 똑같은 선입관으로 우리들을 대했다. 언제나 귀여움을 받았던 친구들은 새로운 담임 선생님한테 사랑을 독차지 했다.

나도 칭찬받고, 인정받으며, 사랑받고 싶은데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올해 만난 선생님은 다르다. 뭐랄까? 아이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챙겨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듬뿍 가진 것 같다.

두 달 정도 생활했는데 전에 만났던 선생님들과는 다른 수업방법이 좋다. 그러나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은 지금의 선생님은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든 못하는 아이든 다 좋아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야외수업을 좋아하신다.

덕분에 봄철 풀꽃 공부를 많이 했다. 그리고 신나는 요리실습도 자주 한다. 이러한 일들은 선생님이 우리를 이해하고 배려해 주기에 가능한 것 같다.

바깥나들이 갈 때면 누구 먼저랄 것 없이 살짝 손잡아주며 이야기 나누는 게 너무 좋다. 난 여태까지 선생님의 손을 처음으로 쥐어봤다. 너무나 따뜻했다.

난 그 동안 문제아로, 열등아 취급을 받았다.

학교에서 왕따였다. 참으로 견뎌내기 힘들만큼 집단 따돌림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다.

"자존심은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처럼 우리의 행복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은 나부터 하지 않아야겠다. 자존심을 가져야겠다.

 

아이의 글을 읽자니 가슴에 묵직한 응어리가 만져지는 듯하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까.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그 동안 아이가 받아야했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함부로 내뱉는 말이나 행동 하나가 직접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두고두고 견뎌내기 힘든 아픔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학창시절 편견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기억을 가졌을 거다.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열정을 그다지 식힐만한 푸근함과 배려가 없었던 탓이다. 나도 아이들에게 공정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똑같은 마음의 거울로 바라보아야할 아이들 중에 도드라져 보이는 아이, 까닭 없이 밉상스럽게 보여지는 아이도 만난다.

 

어른의 감정 파편을 받은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를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아이들도 성인들 못지않게 정신적인 피폐의 고통을 받는다. 이 글머리에 밝혔듯이 딸아이라고, 단지 못생기고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행동이 느리다고 해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건 우리 사는 이치에 맞지 않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베푼다. 당연한 이치다. 뜻하지 않은 일로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마음과 관심을 받았을 때 그는 바로 그 관심과 사랑이 진정한 고마움으로 느껴지고, 스스로 그와 같은 마음을 세상의 누군가를 위해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변하게 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건 사람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아주 작은 사랑과 관심이다. 그 작은 사랑과 관심이 그래도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고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이 세상 그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글머리의 아이 글을 되짚어 본다. 대체 우리가 누구를 꼬집어서 좋아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편견이 아닐까.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떨까.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은 언제나 해맑다. 그들은 헛헛한 것에 욕심 부리지 않는다. 그들이 어른들처럼 금전을 탐내겠나, 쾌락을 탐닉하겠나, 재미로 남을 학대하거나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바람은 한결같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조그만 관심과 사랑이다. 외모나 능력, 행동특성을 따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를 인정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베푼다. 
 
박종국참살이글 2017년 378편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