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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의 불법도청과 도청자료를 유포시킨 게 문제다." 거대재벌 삼성의 불법대선자금과 '경-언-정-검' 유착비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X파일' 사건. 그러나 이번 사건을 둘러싼 쟁점은 점차 '불법도청'과 함께 추가 발견된 274개 도청테이프 등의 내용공개 여부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지난 26일 옛 안기부 특수도청팀 공운영씨 자해소동과 도청자료 유출자로 지목된 박인회씨 구속 등이 이어지면서 주류언론의 관심은 급격하게 '불법도청'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러자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X파일' 사건이 92년 대선 직전 터진 '초원복집 도청' 사건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보수언론이 뒤바꾼 '초원복집' 사건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 "다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 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14대 대선을 사흘 앞둔 92년 12월 11일 부산의 '초원복집'. 김기춘(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전 법무부장관을 비롯 정경식 부산지검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등 8명의 부산지역 기관장들은 지역감정 조장발언을 일삼으며 김영삼 민자당 후보 선거지원을 모의했다. 이들의 '불법 선거개입' 모의와 '지역감정 조장발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당시 국민당 관계자와 안기부 직원이 대화내용을 몰래 도청해 폭로하면서였다. 민주당(후보 김대중)과 국민당(후보 정주영)은 민자당의 관권선거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김영삼 후보진영은 위기상황을 맞았다. 전직 법무부 장관을 비롯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사 등 권력기관의 고위 공직자들이 선거에 직접 개입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후 상황은 거꾸로 전개됐다. 무엇보다 사건전개의 흐름을 바꾼 것은 보수언론의 'YS 편들기'와 지역감정이었다. 당시 보수언론은 '초원복집'사건의 본질인 권력기관과 고위공직자의 '불법선거개입'보다는 상대 후보측의 '불법도청'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김영삼 후보를 노골적으로 편들다시피 한 <조선일보>는 선거 당일인 그해 12월 18일 '부산 모임과 도청과‥'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공작정치'를 소리높여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이번 도청사건은 목적과 관계없이 부도덕한 것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시민생활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파급시킬 것"이라면서 "기관장모임을 도청함으로써 국민당은 선거전략상 호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공사회와 국민생활에 미칠 정보정치의 악영향을 고려할 때 도청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같은 날 조선일보는 5면 머릿기사에서 김영삼 후보의 "'부산사건'은 음해공작 기필코 승리"라는 주장을 소제목으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또 "김영삼 후보는 '나는 이번 선거의 최대 피해자'라고 되뇐 뒤 '공명선거를 이룩하겠다는 나의 소박한 꿈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주었다"고 통탄해했다"고 전했다. 초원복집 도청 관련자 '주거침입죄'로 처벌
'초원복집' 사건으로 잠시 직위 해제됐던 박일룡 부산경찰청장은 경찰청장, 안기부 1차장으로 영전됐고 정경식 부산지검장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 2년째인 1994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당시 박 청장은 김기춘 전 장관이 '초원복집'에서 "당신들이야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것이고,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라며 불법선거운동을 권유하자 "이거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라고 맞장구친 것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러나 법의 심판은 폭로내용과 정반대로 진행됐다. 불법선거 개입 고위공직자들은 면죄를 받은 대신 불법선거를 고발한 사람은 '주거침입죄'로 처벌됐다. '통신비밀보호법'이 제정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법원은 음식점 주인 허락 없이 불법 도청한 행위를 '주거침입죄'로 규정한 것. '주거침입죄'가 적옹된 국민당 관계자와 도청에 관여한 안기부 직원은 벌금 90만원을 선고받았다. 또 정몽준 당시 국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초원복집' 사건 관련자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반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장관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2002년 대선에서 '국민통합21' 후보로 나선 정몽준씨는 그해 10월 관훈토론에서 "불법을 고발하는 방법이 불법이라도 불법을 저지른 분들을 먼저 기소해야 하는데 당국은 그들을('초원복집' 사건 관련자) 전혀 기소하지 않고 나만 기소했다"며 "우리나라가 법의 기본과 양식을 갖추고 있는지 지금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적반하장식 '초원복집' 사건처리를 꼬집었다. 당시 국민당 관계자는 29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재판결과를 지켜본 사람들은 '도둑은 무죄이고 도둑을 잡으려다가 장독을 깬 사람은 유죄'라는 판결에 어이없어 했다"며 "공정선거의 파수꾼이 되어야 할 사법부가 불법선거에 개입한 고위공직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하지 못한 채 면죄부만 주고 말았다"고 씁쓸해 했다. '초원복집' 전철 밟나... 정경유착 고리 끊는 계기 만드나 당시 '초원복집' 사건과 이번 'X파일' 사건은 유사점이 많다. 불법도청을 통해 사건이 드러났고, 검찰 등 권력기관 핵심관계자의 개입, 보수언론의 물타기 보도 등이 대표적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13년 뒤 'X파일' 사건에는 국내 최대재벌 삼성그룹 총수가 핵심 배후자로 등장하는 정도다. 특히 검찰이 두 사건에 공히 관련된 측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원복집'에는 전직 법무부 장관과 부산지검장이 참여했고 'X파일'에는 '떡값'을 수수한 검찰 고위층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은 권력과 자본에 야합한 검찰이 공정한 수사를 할 수 있겠냐는 불신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검찰이 27일 옛 안기부 특수도청팀장 공운영씨 자택에서 274개의 불법도청테이프와 13권의 녹취록을 확보하면서 수사의 주도권은 검찰로 넘어갔다. 시민사회단체와 일부 언론에서는 검찰이 사건을 비리수사 부서인 '특수부'가 아닌 '공안부'에 사건을 맡기자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는 실종되고 불법도청 관계자와 이를 보도한 언론만 희생양으로 삼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초원복집' 사건 당시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사건의 본질을 '불법도청'으로 몰면서 '불법 선거개입'이 실종됐듯 지금도 중앙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이 불법도청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문제는 흐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X파일' 사건을 지켜보는 국민의 눈은 매섭다. <문화일보>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 국민 대다수는 검찰 수사방향과 달리 '삼성 X파일이 불법자료라 할지라도 관련자의 위법행위가 드러난 이상 수사해야 한다'(77.9%)며 재벌총수에 대한 전면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의 본질은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X파일' 사건이 '초원복집' 사건의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철저한 수사와 처벌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끓을지 불신과 기대가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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