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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안 벗고?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걸리면 어케 되가서?" "아… 예…." "빨리 안 벗어? 왜기래?" "저… 함장 동지, 그기 아니구…." 북한 해군 장교와 병사가 폭풍에 휘말려 남쪽으로 떠내려 온다는 가상현실을 코미디로 풀어낸 영화 <동해물과 백두산이>(안진우 감독)의 한 장면. 강원도 강릉해수욕장까지 밀려온 함장 최백두(정준호 분)는 사고뭉치 제대 말년 사병인 림동해(공형진 분)에게 들키지 않도록 북한 군복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서둘러 옷을 벗은 최백두의 사각 팬티에는 누덕누덕 기워낸 흔적이 역력하다. 부끄러운 듯 움츠리는 함장 앞에서, 사병인 림동해는 미적거리며 옷 벗기를 주저한다. 최백두의 강압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바지를 내리는 림동해. 새 팬티에는 '함장 최백두'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너 이 자식…." 아무리 제대 말년 '뺀질이' 사병이지만, 함장 팬티까지 훔쳐 입을 줄은 누가 알았으랴. 화난 최백두는 곧바로 림동해를 모래사장에 처박아 버린다. 하늘같은 직속상관의 팬티를 훔쳐 입은 사병 림동해에 대한 체벌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관객이 현역병으로 병역 의무를 마친 남자라면 무릎을 탁 칠만한 장면이다. 나도 배꼽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 상관의 팬티를 훔치는 군대가 어디 북한군뿐이었으랴.
1994년 7월 9일, 나는 강원도 화천 사방거리 인근 모 보병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화천읍내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 스물한 살의 젊은이에게 낯설었던 그곳은 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였다. 자대 배치 하루 전인 7월 8일, 북한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던 것. 고참을 따라 두려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내무반은 곧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으로 흉흉하고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내무반의 관심은 이내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 더플 백을 들고 들어온 신병에게 쏟아졌다. 귀엽다는 둥, 허약해 보인다는 둥 고참들의 흰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고참 한 사람이 "침상으로 빨리 올라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곧 지정된 관물대 앞에서 더플 백 검사가 시작됐다. 관물대 옆,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내 앞에서 더플백 안의 내용물이 통째로 쏟아졌고 이내 고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뭐냐, 이게?" "네?" "이게 뭐냐구?" "뭐… 뭘 말입니까?" 고참병이 가리키는 곳에는 잘 개어 놓은 대여섯 벌의 속옷과 십여 켤레의 양말이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너 이 새끼, 훔쳤냐?" 당시 훈련병이 자대 배치를 받기 직전 보급 받는 양말은 5켤레, 아래위 속옷은 4벌 정도였다. 사거나 훔치지 않는 이상 모든 훈련병이 지닌 속옷 숫자는 똑같아야 했다. 그런데 양말과 속옷이 와르르 쏟아지니 고참병으로선 기막힐밖에. 사실 양말과 속옷은 절친하게 지냈던 훈련소 분대장과 동기생이 퇴소기념 선물이라며 떠안긴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이 먹혀들 리가 있나. 그 때부터 더플 백이 모두 정리될 때까지 제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얼차려를 받아야만 했다. '에이 XX, 모자라면 문제지만 남는 게 뭐가 문제야?'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자대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절도', 그 중에서도 '속옷 절도'가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당시 각 내무반에는 빨래 건조대가 하나씩 보급돼 있었다. 병사들이 빨래를 하고 나면 이를 햇살이 잘 드는 바깥에 널어놓는데 내무반 15∼6명이 돌아가면서 빨래를 해도 건조대는 항상 빽빽하고 뒤죽박죽 섞이기 마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속옷과 양말을 도둑맞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병사들은 매직으로 자신의 속옷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써놓았다. 이등병 시절 어느 날, 빨래를 걷으러 돌아와 보니 건조대가 휑하니 비었다. 널어놓은 양말과 팬티, 러닝셔츠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당황한 이등병의 귀에 일석점호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도 없고, 고작 이등병이 고참들에게 가서 "속옷 내놔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랴. 고참 팬티 입은 일병, 이등병 팬티 입은 상병 그날 일석점호 시간에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점호를 맡은 장교가 난데없이 '위생검사'를 하겠다며 모두 체육복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스무 살이 넘은 젊은이들한테 위생검사라니…. 자존심 상하고 쪽팔렸지만 명령에 따를 수밖에. 침상 끝에 정렬한 열댓 명의 병사들이 모두 체육복 바지를 내렸다. 그 순간 다른 병사들의 당황한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 앞에 마주보고 선 일병 하나는 내무반 최고참의 팬티를 입고 있었다. 맞은편 오른쪽 대각선에 있는 상병은 내 팬티를 입고 있었다. 아뿔싸, 둘러보니 자기 팬티를 입고 있는 사람은 절반도 안됐다. '남의 팬티'를 입은 병사들은 차마 미안했던지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웃을 수도 없는 그날 밤의 해프닝은 그렇게 지나갔다. 내무반 최고참 팬티를 입은 일병은 어떻게 됐냐고? '위생 점호'를 대비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도둑질에 대한 별다른 처벌은 없었다. '림동해'를 보며 내가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군 시절 경험 때문이었다. 함장 팬티를 훔쳐 입은 림동해의 모습에서 10년 전 열악했던 한국군 사병들의 생활을 봤던 것이다. 영화와 현실의 '팬티 절도사건'은 내게 또 다른 군대의 아픈 기억을 이끌어냈다. 부대 밖에서는 멀쩡하게 돈을 벌어 '메이커 팬티'라도 사 입을 수 있었던 젊은이들이 남의 속옷까지 훔쳐 생활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 적어도 96년 7월, 내가 전역하기 전까지의 전방부대 내무반은 생활이 아니라 '생존'하는 곳이었다. 당시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주는 월급은 2만원이 채 안 됐고 병사들은 그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진급할 때 부대에서 나온 계급장을 전투복에 붙이는 몇 천원의 '바느질 삯'에서부터 3000원짜리 '사제 전투모'를 구입하는 돈도 모두 병사들 월급에서 나왔다. 그 뿐이랴. 병사들은 손꼽아 기다리는 휴가도 모두 자기 돈으로 다녀와야 했다. 10년 전, 강원도 화천에서 고향인 부산까지 내려오는 차비는 약 3만원 정도였는데 휴가 신고를 마친 내 손에 쥐어진 돈은 1만5000원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만약 그 때 탈영한 한 병사가 "부대에 돌아올 차비가 없어서 미복귀했다"고 주장했다면 지휘관의 반응은 어땠을까. '월남에서 돌아온 무전기 상사'께 "충∼성!"
스물 한두 살 병사들보다 더 오래 살아온 무전기가 훈련장에서 고장을 일으킬 때마다 통신병은 중대장으로부터 불호령을 받았다. 벌써 '만기제대' 했어야 할 P-77 무전기. 미군이 베트남 전에서나 쓰던 무전기가 오작동하는 게 어떻게 병사들의 탓일까. 지난 10월 27일 새벽 전역 넉 달 만에 위암 말기로 세상을 떠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은 이런 '가난한 환경' 속에 놓였던 한국군 사병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국방부는 이번 기회에 사병에 대한 군 의료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나섰다. 하지만 문제는 열악한 '의료체계'만이 아니다. 일년에 옷 두어 벌, 신발(전투화) 2족, 한 달에 한번 보급 나오는 속옷과 양말. 60만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을 끌어 모아 전쟁을 대비하는 군 당국이 지금껏 해준 것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필품일 뿐이었다. 국방부는 또 최근 뒤늦게야 '병영문화개선안'을 내놓고 '사병 월급을 8만원으로 올린다', '침상형 내무반을 침대형 내무반으로 바꾼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청사진은 그럴 듯하지만 문제는 국방부의 실천의지다.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에 따르면 전체 국방비 22조원 중 사병 복지를 위해 쓰이는 돈은 단 1700억원(8%) 수준일 뿐이다. 그 외 국방비는 여전히 신형 무기를 사고, 장교들 월급 주는데 쓰이고 있다. 1대당 1000억원이 넘어간다는 신형 전투기 1~2대만 도입을 늦춰도 병사들의 혜택을 높일 수 있는데도 여전히 국방부는 '돈타령'만 하고 있다. 군에서 '팬티 절도사건'을 겪은 지도 10년이 지났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그 10년 새 대한민국 군대는 별로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변변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노충국 사건'이 명확한 증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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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 조~ 경~ 국! 편지 왔다. 조기주? 애인이냐?" 1994년 11월. 신병교육대에 입대한 지 며칠 만에 새파란 훈련병인 내 앞으로 첫 편지가 배달됐다. 그러나 연애편지에 대한 설렘도 잠시, 조교가 내무반 훈련병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한 이름은 애인의 이름이 아니었다. 발신인 란에 붓글씨로 써내려간 조.기.주라는 이름 석자는 생전 내게 편지라곤 보낸 적이 없던 아버지였다! "아버진데요"라는 내 말 한마디에 내무반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이어 침상 끝에 '각'을 잡고 있던 동기들이 킥킥 웃었다. 설마 군대에서 받은 첫 편지의 발신인이 아버지라니. 고참이 내게 물었다. "야, 너 뭐 사고치고 들어왔냐? 도대체 니네 아버님이 왜 편지를 쓰신 거야?" 그러게. 나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할아버지, 할머니는 잘 계시고... 니 동생은 여전히 공부도 안하고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고... 암튼 걱정 말고 군 생활 잘 해라.... 사람은 자고로 군대를 갔다 와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다. ....." 200자 원고지 10장에 빽빽이 써내려간 그 글은 틀림없는 아버지의 필체였다. 특별하지도 않은 가정사에 대한 나열이 한참 이어지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새삼 새록새록 솟아오를 즈음, 마지막 한 문장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탈영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렇다. 아버지가 정작 하고 싶던 말씀은 그 마지막 문장이었던 것이다. 입대하기 전, 여자친구에게 기다리기 힘들면 고무신 거꾸로 신어도 된다고 미리 말해두었지만 내심 여자친구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신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6주 신병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사랑하는 아들아"로 시작해서 "탈영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라"는 내용으로 끝나는 편지가 매주 한통씩 도착했다. 여자친구도 아닌 아버지가 매주 편지를 보내고, 마지막 내용이 '탈영금지'라는 사실에 같은 내무반 동기들은 부러움 반, 호기심 반의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애인이나 친구, 누나, 동생에게 편지를 받는 일은 있었어도 아버지에게 그것도 '탈영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받는 훈련병은 내무반에서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편지의 사연을 제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탈영하지 마라? 너 무슨 사고치고 들어왔냐?" 60년대 말 헌병으로 복무했던 아버지가 군대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었던 건 애인문제로 군대를 벗어났다가 잡혀오는 탈영병들이었던 것이다.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여자친구를 남겨두고 입대한 내가 내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때 6관구 헌병대 구치소엔 탈영병만 한 300명 있었지." "그렇게 많이요? 그런데 무슨 일로 탈영했데요?" "대부분 여자 문제였지. 갑자기 애인한테 편지가 끊기면 얼마나 갑갑해. 어떻게든 나가려고 발버둥치다 탈영하는 거지. 구치소에서 6개월 있다 다시 부대로 돌아가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게 된 아버지가 6관구 헌병대 구치소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뿐인가? 아버지가 군 복무했을 때만 해도 몸에 맞지 않는 전투복이나 전투화를 지급받는 건 예사였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신병교육대에서 죽지 않을 만큼 구타를 당하거나 돈을 거둬 중대장이나 조교들에게 뇌물을 썼다는 것도 아버지 세대에겐 흔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아버지가 경험한 군대와 아들이 경험할 군대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60년대 보다야 훨씬 나아졌지만 얼차려와 구타는 여전히 존재했고, 한번 지급받은 보급품은 몸에 맞지 않더라도 바꾸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성문제는 곧잘 군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애인을 친한 친구에게 빼앗기고 절교편지를 받은 사병들이 "이 나쁜 **야, 내가 지금 간다"고 외치는 소리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 상병 애인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면 그 사병은 바로 '관심사병'으로 특별관리(?) 됐다. 그러나 내 신병교육대 생활은 아버지의 기우와 달리 너무도 심심하게 흘러갔다.
사실 나는 입대 전에 군대생활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1994년 초, 가장 친했던 친구가 고참의 구타에 못 이겨 자살한 사건을 겪은 것이다. 입대한 뒤 잘 있다는 편지까지 보냈던 친구의 죽음은 내게 군대라는 곳을 '당연하게 갔다 와야 할 곳'에서 '잘못하면 생사람 잡는 곳'으로 바꿔놓았다. 친구의 묘를 다녀온 뒤, 나는 군대에 대한 모든 환상을 접었다. 그리고 입대 후에는 군 생활에 대한 요령을 빨리 익혔다. 군대에선 무엇이든 '중간만 하면 된다'는 예비역 선배들의 조언을 지키려고, 잘하는 것이든 못하는 것이든 중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구보도 중간, 뺑뺑이 선착순도 중간, 침상 정리도 중간, 밥 먹으러 갈 때도 중간, 밥 먹고 나올 때도 중간 이런 식이었다. 이것도 야밤 단체 얼차려와 구타에는 효력이 없었지만 튀거나 뒤처지지 않는 것이 편하게 군 생활하는 것이라는 선배들의 충고는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비겁했지만! 운도 따랐다. 시골 출신이었던 나는 새끼 꼬는 일을 할 줄 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동기 훈련병들이 피나고 알배기고 이가 갈린다는 'PRI'(사격술 예비훈련, 총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 엎드렸다를 하루 종일 하는 것) 훈련을 하는 동안 세월아 네월아 하며 짚단을 엉덩이에 깔고 월동준비용 새끼 꼬는 특수임무(?)를 수행하며 무사히 신병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병교육대의 무난한 내 군 생활 덕이었는지 아버지의 편지도 자대 배치를 받은 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편지가 비록 '탈영금지'라는 목적을 띤 것이었다고 해도 내겐 '소통'의 창을 열어준 것이었다. 매일 마주하면서도 몇 마디 말조차 나누지 않았던 아들에게 매주 원고지 칸을 메워가며 관심을 보여준 아버지의 편지는 내게 답답한 군생활의 탈출구이자,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받아먹고 사는 군대라는 조직 속에서 젊은이들은 '소통의 자유'를 목말라 한다. 애인이나 친구, 가족의 편지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게 그런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 식사시간 후 짧게 주어지는 자유시간, 부대 안에 유일했던 PX 앞 공중전화에서 고참들의 눈치를 보며 건너편에서 누군가 수화기를 들어주기 바라는 이등병의 애절함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든 아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계셨던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기에 건강하게 군 생활을 마쳤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더 좋은 건 외부와의 소통 대신 군 내부에서 사람냄새 나는 소통이 가능해 지는 일일 것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군대 내 사건 사고도 대한민국 군대가 '소통'은 없고 '명령'만 존재하기 때문은 아닌지. 아무리 군대가 명령에 죽고 사는 곳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사병이 겪는 고통에 대해 관심 가지고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참, 그런데 입대 전에 '고무신 거꾸로 신어도 된다'고 말해두었던 여자친구는 어떻게 됐냐고? 결혼해서 토끼같은 딸 둘 낳고 나와 함께 잘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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