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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다...' 그랬습니다. 홀로 한 송이 피어 있는 것도 외로운데 그 누군가 말해 주었던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 볼 수 없다는 것도 외로웠고, 혼자서는 그 어느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나비에게 손짓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슬펐습니다. 작은 꽃 이파리에는 누군가 낳아 놓은 작은 알 하나가 있었는데 작은 꽃은 그를 친구 삼아 외로움을 달랬지요. 그 친구가 자기에게 아주 큰 아픔을 줄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작은 이파리로 알이 추울까 감싸 주기도 하고, 햇살 맑은 날에는 이파리를 활짝 펴서 따스한 햇살을 마음껏 쬐게도 했습니다. 그것이 작은 꽃의 친구라 생각했고, 꽃이 지기 전 그 작은 알에 들어있는 생명이 태어나기만을 고대했습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알에서 깨어났으면 좋겠어." "......" 작은 꽃 한 송이는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에 온 몸이 떨려왔지만 자기 이파리에 있는 작은 알에서 생명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습니다. 드디어, 가을 끝자락 햇살 따스하던 날 작은 애벌레가 알에서 깨어났습니다. "안녕!" "......" 그러나 작은 애벌레는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깨어나자마자 게걸스럽게 이파리를 갉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파, 아프다고. 이제껏 너를 감싸 주고 돌봐 준 대가가 겨우 이런 것이야?" "......" 그렇게 이파리에 구멍이 나고 하나 둘 이파리를 잃어 갈 즈음 애벌레는 점점 자라 초라해진 꽃을 떠나 버렸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는 비록 제 몸을 갉아 먹던 애벌레였지만 그가 떠나자 또 외로워졌습니다. '겨우, 외로움 달래줄 친구 하나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게 상처만 주고 떠나가 버렸어.' 그렇게 홀로 남은 작은 꽃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잊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외로움과 추위도 잊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진 삶,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그 생명을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몇 차례 몰아치고 밤새 내린 눈을 작은 꽃송이에 가득 담아 아침 햇살을 맞이할 때면 따스한 햇살이 하얀 눈을 녹이곤 했습니다. 그렇게 눈이 쌓이고, 녹고 다시 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작은 꽃은 맑고 투명한 얼음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맑고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힌 꽃은 이제 더 이상 춥지도 않았고, 찬바람이 불어도 더 이상 춥지 않았습니다. 이젠 밤이고 낮이고 항상 활짝 핀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맑은 얼음 조각으로 투영되는 세상, 그 세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외로움과 애벌레로부터 받은 상처 같은 것들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애벌레는 멀리가지 않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나뭇가지, 까치발을 들고 보면 보일 만한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고치를 만들고는 겨울을 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고치를 바라보며 지내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혹시, 지난번처럼 또다시 나에게 상처만 주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겨우내 그 고치를 바라보던 작은 꽃은 그에게 상처를 받더라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없는 숲, 비록 상처를 받긴 했지만 그로 인해 그가 살아갈 수 있었으니 그 안에 자신도 들어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니 진정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계속 될 것만 같았던 겨울, 그 겨울도 이제 막 떠날 준비를 하고 아직도 눈 쌓인 풀섶 여기저기에서 푸른 싹들과 작은 꽃망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복수초, 하얀 바람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고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얼음도 조금씩 녹기 시작했습니다. "안녕! 꽃들아." "그래, 안녕, 네가 말로만 듣던 얼음꽃이구나!" "얼음꽃?" "그래, 겨우 내내 활짝 웃으며 피어있는 꽃말이야. 지난 겨울 땅 속에서 네 이야기를 들었어.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나왔어." 그제야 내 이름이 '얼음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 나에 대해 또 어떤 이야기를 들었니?" "응, 봄 햇살이 겨울을 다 몰아내고 얼음이 녹을 때쯤이면 너도 시들어 버린다고 했어. 아니 시들어 버린다기보다는 짓물러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했어." "뭐라고? 그럼 내가 따스한 봄날을 살지도 못하고 죽는 거야?" "아니야, 죽는 건 아니야. 우린 또 피어나니까. 죽는 것은 아니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꽃 친구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막 따스한 계절이 돌아온다고 좋아했는데 얼음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니 너무도 슬픈 운명인 것 같았습니다. '단 하루, 그래, 단 하루만이라도 아니, 저 애벌레가 고치를 벗어 버리는 날까지 만이라도 살고 싶어.' 그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이 들으신 것일까요? 그 날 고치가 열리고 아직은 추운 겨울바람 남아있는 그 숲에 화사한 나비가 태어났습니다. "와!" 추운 겨울 뒤로하고 피어난 봄꽃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나비는 우아한 날갯짓으로 훨훨 날아 얼음꽃에게 날아가 세상에 태어나 첫 입맞춤을 했습니다. "고마웠어." 얼음꽃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에 제 몸이 녹아지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뜨겁게 울었습니다. 지금도 깊은 산 속 어딘 가에는 외롭게 피어있는 얼음꽃 한 송이가 있고, 그 이파리에는 작은 애벌에의 알이 단 하나 있답니다. 그 알이 나비가 되어 가장 먼저 입맞춤을 하는 꽃, 그 꽃은 바로 얼음꽃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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