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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지역의 별이었던 이선관 시인 별세

요리조리쿡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12. 15.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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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관 시인 '시민문화예술인장'으로 치른다
이선관 시인 별세...마산의료원 조문 행렬

 

강진우 기자 jwkang@dominilbo.com

 

제3보(14일 저녁 10시30분)=이선관 시인의 장례가 지역의 문화 예술인,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시민문화예술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14일 오후 8시부터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마산의료원 장례식장에 모인 마산의 문화 예술인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이 같은 뜻을 정했다.

공동장례위원장에는 경남도민일보 허정도 사장, 마산문화방송 박진해 사장, 경남예총 이상용 회장, 경남민예총 고승하 회장, 마산문협 김복근 회장이 맡기로 했으며,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은 경남문화진흥원의 윤치원 부원장이 맡는다.

장례위원회는 고인의 뜻대로 화장을 하고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기로 했으며 향후 구체적인 장례일정은 논의를 거쳐 정하기로 했다.

   
▲ 14일 저녁 이선관 선생의 빈소에서 장례위원회 관계자들이 장례절차를 논의하고 있다. /이원정 기자

   
▲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 등 지인들이 조문하고 있다. /박일호 기자
제2보(14일 낮)=간경화와 싸우던 이선관 시인이 14일 오전 8시 45분 향년 6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마산의료원 장례식장 3분향실에 차려진 고인의 빈소에는 임종을 지켰던 장남 이완수(31)씨와 처남인 홍원표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군 대위인 차남 이경수(29)씨는 평택에서 오고 있는 길이다. 오전 10시 30분까지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과 같은 교회에 다녔던 김명숙씨가 빈소를 다녀간 상태다.

   
▲ 별세하기 하루 전날인 13일, 마산의료원 707호실에 입원해 있는 이선관 시인을 문병하기 위해 찾은 김상실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허정도 경남도민일보 사장, 김태호 사무국장, 손종호 기획운영분과 위원장 등이 쇠잔해진 모습으로 누워있는 이선관 시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김구연 기자
최근 고인을 문병했던 송인식 관장은 “연말을 넘기지 못할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버릴줄은 몰랐다”며 아쉬운 마음을 쏟아냈다.

마산의료원측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께 간경화로 인한 위장 출혈이 심해졌고 이 피가 기도로 넘어가면서 마비 정상이 왔으며 오전 7시 5분부터 한시간이 넘도록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의식을 차리지 못했으며 끝내 사망했다고 전했다.

장례는 기독교 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발인은 16일 오전, 장지는 마산 인곡 공원묘지에서 화장 한 후 납골당에 안치할 예정이다.

처남인 홍원표씨는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언도 받지 못했다” 며 “기독교 식으로 장례를 치룰 것”이라고 밝혔다.

/강진우 기자

속보(14일 오전 9시40분)=‘마산의 문화재’ 이선관시인이 14일 오전 8시 4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4세. 빈소는 마산의료원 3분향실. (055)249-1463.

 

시인 이선관의 삶과 죽음
급히 고쳐 쓴 이성모 교수의 애도 칼럼

 

고정필진 webmaster@idomin.com

 

이선관 시인이 영면하셨다. 지난 13일 '이선관 시인의 쾌유를 기원하며'라는 글을 경남도민일보 ‘열린아침 곧은소리’란에 싣기 위해 보냈는데, 오늘 고쳐 쓴다. 하루 밤 모진 겨울바람에 시인은 파리한 꽃잎 같은 눈시울을 기어이 접어버리고 말았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인 1971년 <씨알의 소리> 제 10호에 <애국자>라는 시를 써서 등단한 시인 이선관.

“빛이 / 어둠을 사르는 / 새벽이었다. // 문틈에선가 / 창틈에선가 / 벽틈에선가 / 나의 침실 깊숙이 파고드는 // 동포여 ! / 하는 소리에 매력을 느끼다가 /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보니 // 똥퍼여 ? / 라는 소리라 / 나는 두 번째 깊은 잠에 취해버렸다. ” (<애국자>)

똥 같은 사이비 애국자가 판을 치는 조국의 현실에서 스스로 사이비를 고집했던 시인이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같은 동포일 터이지만 속은 다르다는 것. 다르다는 그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은 실로 다양하다. 이를테면 ‘삼류시인’(<삼류시인>), ‘넝마주의’(<넝마주의>), ‘보통시민’(<보통시민>), ‘거지’(<거지론>), ‘바보’(<바보>), ‘창동 허새비’(<마산, 그 창동의 허새비>)등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백일해 치료를 위해 먹은 한약이 잘못 되어 그는 “소생할 가망이 없다가 / 다시 깨어난 저는 / 자라면서부터 / 목을 잘 가누지 못했고 / 말을 잘 하지 못했고 / 걸음을 잘 걷지 못했지요.”(<어머니∙3>)가 되었다.

그의 첫 시집 <기형의 노래>는 인간의 본꼴과 생김새가 비정상적으로 된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의 구조와 나아가야 할 길이 비틀리고 그릇된 것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며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진실을 찬미하고 허위를 풍자하며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寄淵兒(기연아)>)라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인용하면서 “그러한 생각으로 나는 글을 써왔습니다”(<창동허새비의 꿈>책머리에)라고 하였다.

시집 <인간선언>과 <보통시민>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어둠과 소시민의 양심과 애환을 노래하였고, 시 <독수대>를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환경생태시를 써왔고, 시 <지금 마산은>을 비롯하여 민주화의 성지 마산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이야기해왔을 뿐 아니라, 시정의 부조리한 일에서부터 역행하는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마이클 잭슨에서부터 부박한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질타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시대와 역사에 조우한 민족 현실과 모든 정황에 아파했던 그가 이제 더 이상의  아픔이 없는 세계로 떠났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 많은 이들이 시인으로서 그를 보는 시선은 그 자신이 말했듯이 “술도 많이 마시고 가난하고 데카당한 이 시대에서 낙후된 존재”였다.

그때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가난하다. 우리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무엇이 있는가 보고 다시금 올라와야 한다.” (이선관, <시인의 평가절하>) 그런 그가 다시금 올라오기에 힘겨워 하다가, 결국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

문득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순의 첫 소설 <굶기> 여기저기에 있는 핵심 구절이 떠오른다.

“한 젊은 남자가 어느 도시에 들어선다. 그에게는 이름도, 집도, 직업도 없다. 그는 그 도시에 글을 쓰러 온 것이다. 그는 글을 쓴다. 아니 좀더 정확히, 그는 쓰지 않는다. 그는 굶어 죽을 지경이다. 굶주림의 미로, 그는 거의 미쳐간다. 그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그는 쓴다. 이따금씩 그는 용케 글을 팔아 궁핍으로부터 일시적인 집행 유예를 받는다.”

이제 그에게 집행유예를 언도할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없다. “살아있되,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로 살았던” 삶의 치열성이 문학적 위대함으로 승화된 그의 문학이 고호의 노오란 해바라기 그림의 종이꽃처럼 언제까지라도 우리에게 스며들기를 바란다. 재세(在世) 이성모 묵도(默禱).

/이성모(문학평론가∙마산대학 교수)

 

 

[사설]지역의 별이었던 이선관 시인

 

경남도민일보 webmaster@idomin.com

 

지역의 큰 별이 졌다. 어제 오전 마산토박이 이선관 시인이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어릴적 백일해를 치료하느라고 부모가 잘못먹인 한약탓에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이 시인. 장애탓에 사람대하기가 껄끄러웠으나, 학창시절 내내 왕따였지만, 오히려 그건 그의 삶을 담금질하는 요소가 됐다. 자연스레 책과 친해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이고, 가치관이 정립되어갔다. 3∙15, 4∙19, 부마항쟁 등 시대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행동했으며, 끊임없이 마산의 정신을 지역민에게 일깨웠고, 죽어가는 마산의 환경을 걱정했다. 나아가 민족의 현실과 고통에 아파했다.

그는 42년에 태어나 69년 자기고백적인 내용의 첫 시집 <기형의 노래>를 시작으로 작품활동에 들어갔고, <나무들은 말한다>까지 총 13집을 냈다. 그는 장애를 앓았으되, 그가 진정 걱정하고 안타까워 한 것은 사회적 장애였다. 75년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상징되는 분별없는 공업화 때문에 마산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전국 처음으로 발표한 환경시 ‘독수대’는 장애를 앓는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는 이 시로 교보환경문화상을 수상했고, 이같은 환경에 대한 관심은 2003년 새만금환경시 릴레이로 이어졌다.

친일과 관련해선 언제나 곧은 소리를 냈다. 그는 누구보다도 노산문학관이 아닌 마산문학관이 되어야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 고장에서 출생한 유명한 문인이 오데 이은상 뿐이가. 유명하기로 치면 천상병 김용호 김수돈 정진업 이석 권환 박평주 많다 아이가.”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일갈하기도 하고, 언론에 대한 따끔한 일침도 빼놓지않았다. 전직기자가 쓴 <신문소 습격사건>이라는 책엔 그의 시 ‘신문과 신문지’도 실려있는데, 그는 ‘신문과 신문지가 /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 단순하게 말하라. 읽을거리 볼거리가 있는 건 / 신문이고 / 먹고 난 자장면 빈 그릇을 덮어 / 대문밖에 내어놓은 것이 신문이다’라고 했다.

이외도 그의 수많은 작품이 그의 시집외 출간물에 실렸으며, 이는 그때그때 지역사회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록 그는 세상을 등졌으나, 지역사회뿐 아니라 한국문단에서 그를 기리는 작업은 부단히 이어지리라 기대된다.

/논설위원

 

이선관 시인 마산의료원 빈소...추모객 줄이어
인터넷 도민일보 추모댓글도 잇따라

 

강진우 기자 jwkang@dominilbo.com

 

‘몸의 굴레가 마음의 굴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이선관 시인이 하늘나라로 떠나던 날. 그의 넉넉한 웃음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은 날씨만큼이나 시렸다.

○...시인이 위독하다는 소리를 듣고 오전 7시에 병원으로 달려온 마산의료원 내과 손미정 과장이 1시간이 넘도록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그는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손 과장은 “최선을 다해 의식이 돌아오도록 했지만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이날 마산의료원 장례식장 3분향실에는 어릴 때부터 불편한 몸으로 안고 다니며 키웠던 두 아들과 둘째 며느리, 처남과 누나, 조카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검도학원 관장인 큰아들 이완수(31)씨는 “아버지는 가진 것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가셨을 것”이라며 “돌아가시기 전 특별한 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죽고 나면 화장하라’는 말은 입원 전부터 하셨다”고 말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평택 제 2함대에서 해군대위로 근무하고 있는 시인의 둘째아들 경수씨와 며느리 윤지현(29)씨는 아버지 가시는 마지막 길에 함께 하지 못했다며 죄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인상을 그대로 그려놓은 캐리커쳐 영정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살아생전 외로움에 절어 있던 아버지의 죽음조차도 외롭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시인의 누나 이선자(66)씨는 “고인은 평생 하고 싶은대로 하다가 갔기 때문에 크게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착했기 때문에 좋은 곳에 갔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시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조문 행렬도 이어졌다. 이들 중에는 살아생전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작가 김관수씨는 “오늘 병원에 병문안 하러 나온다고 차에 시동을 켰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 부랴 달려 왔다”며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전이라도 찾아서 살아생전 사람 기분좋게 하는 얼굴 한번 봤어야 했다”며 머리를 숙였다.

또한 그는 시인과의 추억을 만들었던 극단 새나래와 극단 2층에 있던 찻집 유리동물원, 부림시장에 있던 선술집 고모령을 떠올려 시인의 웃음과 시를 이야기하며 이제는 다시 볼수 없고, 들을 수 없음을 섭섭해했다.

○...지역 문화∙예술계 원로들도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최근 시인을 찾아 격려했던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은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빈소를 찾았다. 백화 한송이를 헌화하던 송 관장은 “나를 두고 먼저 가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보면 나이 순서대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며 “가거든 먼저 간 친구와 선배들 만나서 인사 전해 달라”고 탄식했다.

경남∙마산문인협회 이광석 고문도 “이선관 시인은 ‘창동백작’과 ‘보통시민’으로 불리며 광범위한 시활동을 펼쳤다”며 “마산 문단이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고 말했다.

○...마산의 상징으로 인식되던 시인의 죽음에 대해 지역 문화 예술계와 시민사회단체는 장례식 형식을 의논하고 있다.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영만 의장은 “저녁에 빈소를 찾아 지역시민사회 단체 회원들과 함께 시인의 가족과 의논을 한 후 문화예술계나 시민사회단체장으로 할 지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시인의 별세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인터넷 도민일보(idomin.com)의 해당 기사에도 시인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글이 잇따랐다.

최한경씨는 “순수함과 삶의 소박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신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눈리 시리도록 청명한 겨울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주소서”라는 글을 올렸다.

또 남두현씨는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자유롭게 날아 다니시며 가끔 후배들을 지켜보시고 잘못이 있으면 꾸짖고 바로 잡아 주소서”라고 했으며, 마창환경운동연합 이인식 의장도 “무학산에서, 합포만에서 늘, 마산을 지켜보시면서 3.15의 정신을 시민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라는 추모글을 올렸다.

김대하씨는 “이제 그 환한 웃음은 더 보기 힘들게 된건가요?...선생님은 떠났지만, 선생님이 남긴 글들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할 겁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윤미숙씨는 “선생님의 시구절들이 가슴에 남아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셨다니 마음이 무너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도 못하고...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애통해했다.

강정철씨는 “멀리 차디찬 하늘 가엔 / 해가 저물고. // 저녁노을 지니 / 외로운 그대 단정학은 / 날개를 접네. // 함께 한 시간은 짧은 찰나인데 / 영원한 이별은 이리 쉽게오네 // 고통 가득한 이승일랑 / 잊고 가소서”라는 짤막한 조시를 올리기도 했다.

이밖에도 성일환, 김소봉, 조영숙, 이숙희, 이종은씨 등이 실명으로 추모글을 남겼다.

 

<기고시> 간장바다
이선관·병상에서 쓰다

 

경남도민일보 webmaster@idomin.com

 

   
▲ 이선관 시인
마산 몽고간장이 언제 창원으로 옮겨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오래 전부터 간장바다가 된 마산 바다를 두고
소문도 없이 옮겨갔다네
그런데 마산 앞 바다가 간장 바다가 된
근본원인을 찾아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고
(미군 소속 잠수함기지에 방파제를 없애
물의 회전을 해야 함)
환경의 날이니 물의 날이니 바다 살리기 운동이니
하면서 예산 낭비만 하고 있고
금년에는 ‘국제○○연극제’가 간장바다 가운데
위치한 명물 아닌 명물 돝섬에서 열린다 하니
돝섬 아닌 돝섬을 관광하러 오는 내외관광객들에게
마산시민의 한 사람으로 송구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나 역시 오래간만에 구경을 갔다 돌아가는 길에
택시를 탔더니 운전하던 기사가 하는 왈
크나큰 가마솥에 간장바다 두어말 부어
몇시간 끓이면 아주 진한 국내최고의 품질인
맛 좋은 간장이 되겠습니다 라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더이다
(200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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