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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이 돋는다, 하담이 눈뜰 때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5.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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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이 돋는다, 하담이 눈뜰 때…

성폭력 피해자 쉼터 ‘하담공동체’가 꿈꾸는 자립의 미래… 장기간의 공동 생활에서 자기애와 긍정을 배운다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양화대교가 걸린 서울 한강의 북쪽, 합정동 주택가엔 글간판 대신 예쁜 그림 하나 걸린 작은 집이 있다. 작은 뜰엔 나무가 자라고 반지하로 가는 계단 앞엔 앙증맞은 화단도 있는 아담한 곳이다. 13년 전 문을 연 뒤 4만5천번에 이르는 상담을 통해 갈 곳 없는 240명의 피해 여성들을 보듬어온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이미경)의 ‘본가’다. 올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번듯한 아파트에 ‘분가’를 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립을 준비하며 취업과 진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공동체 ‘하담’을 만든 것이다.


△ 성폭력 피해자들은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넘어 경제적 자립을 통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늘을 담은 집, 하늘을 닮은 집이라는 뜻의 ‘하담’은 피해 여성들이 단기간 머무르는 ‘열림터’와 달리, 길게는 2년까지 지내며 차분히 앞날을 계획할 수 있는 곳이다. 전국에 14곳의 열림터가 퍼져 있지만 이처럼 18살 이상 성인 여성들을 위한 장기 공동체는 이곳이 처음이다.

 

“준비없이 떠나간 그녀들이 안타까웠다"

3월16일 오후 성폭력상담소 사무실에선 ‘하담’의 탄생을 축하하고 충만한 미래를 기원하는 행사가 열렸다.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정봉협 여성부 국장, 김삼화 변호사(성폭력상담소 이사장) 등 여성계 활동가 40여명이 모여들었다. 그러잖아도 발 뻗을 곳 하나 없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야 하는 지하층 모임방이 금세 빼곡히 들어찼다.

 

하담 열림식 단상엔 흔히 고사상에 올리는 돼지머리를 대신해, 경제력을 의미하는 돼지저금통이 놓였다. 내면의 강한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정신을 상징하는 뜻에서 향도 준비됐다. 곧 하담에서 살아갈 ‘해’와 해를 돕는 ‘달’(정기 후원자)과 ‘별’(비정기 후원자)을 뜻하는 세 가지 양초에 나란히 불길이 당겨졌다.

 

이미경 소장은 “올해는 열림터가 10돌을 맞는 때”라며 “열림터에 있다가도 6개월이 지나면 아무런 준비 없이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여성들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웠다”고 인사말의 운을 뗐다. “그동안 우리는 생존자들이 앞날을 개척해나가기 위해 하담과 같은 장기 쉼터가 생겨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왔습니다. 이제 꿈이 실현돼 마포구의 45평 전세 아파트를 마련했고, 그곳에 7명 정도가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13년 전 7.5평 오피스텔에서 상담소를 시작해 오늘과 같은 집을 갖게 됐습니다. 이처럼 하담도 앞으로 번성해나갈 것입니다.”


△ '찬란한 비행을'. 참석자들이 금줄에 축원을 담은 종이를 묶고 있다.

이어 하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축하공연이 열렸다. 2년 전부터 경기민요를 배워온 활동가 홍보연씨가 나섰다. 홍씨가 소리를 메기면 참석자들이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자매야 딸들아 하늘을 품어라, 꺾였던 가지에 새순이 돋네.” 구성진 소리가 울리며 흥겨움을 더했다. 곧 축원 고사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에겐 수십개의 종이쪽지를 매단 금줄이 돌아갔다. 폭력·외로움·절망·분노 등 피해자들이 극복해야 할 나쁜 감정들을 적은 쪽지를 떼고, 각자 하담에 축원하는 글을 적은 종이를 묶었다.

“아픔을 말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는, 내 곁에는 고통을 함께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치유를 향한 긴 여행을 시작합니다.” 변혜정 성폭력문제연구소 소장이 또박또박 고사문을 읽어내려갔다. “천지신명이시여, 여성의 일을 주관하는 모든 여신들이여, 이제 하담이 시작을 올립니다.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이 종식될 수 있기를, 더 이상 생존자들에 대한 무지한 비난과 권리의 침해가 없기를, 고통에 맞설 때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사라지기를 비옵니다. 생존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기를, 자신의 언어를 찾을 수 있기를, 삶의 자립을 실현할 수 있기를 비옵니다.”

 

현행법상 6개월이상 피해자 돌보지 못해

로또복권이 사행심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많지만 사실 하담이 생겨난 것은 로또 덕분이기도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의 복권기금에 지원사업을 신청해 이로부터 2억5천만원을 지원받아 집과 살림살이를 구한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대부분 친족 등 가까운 이라는 점 때문에 피해자들은 사건 뒤에 가해자와 반드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호기관에서 머물다가도 성인 여성들은 다른 시설로 옮겨갈 수 없어 아무런 자립 기반 없이 또다시 폭력 앞에 노출되기도 했다. 현재 성폭력특별법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시설을 6개월 이내로 규정하고 있어 여성계에서는 피해자를 위한 장기시설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조중신 열림터 원장은 “하담의 출발을 계기로, 성폭력특별법에 장기 쉼터 설치를 명시하도록 법 개정 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돼지머리 대신 돼지저금통이 놓인 고사상.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기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하담의 시작이 더욱 뜻깊은 것은 이곳이 관리되고 감시되는 시설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동체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하담에선 두 사람이 방을 함께 쓰게 되는데, 각자 방을 스스로 꾸밀 수 있으며 관리자를 따로 두지 않고 하담인들이 스스로 생활을 꾸려간다. 함께 만든 생활 공동규칙을 지키며 서로간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살아가게 된다. 생활비 중 일부는 본인이 부담해야 하고, 청소·요리 등 생활 관리는 각자 또는 공동으로 이뤄진다. 세간을 준비하는 것부터 내부 교육 프로그램까지 총괄하는 ‘하담지기’ 원사(34)는 “피해자들은 보통 ‘내 탓’을 하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쉽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일상을 함께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서로 믿는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가꿀 수 있다”고 말했다.

 

‘독립’위한 징검다리를 놓아주세요

현재 하담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19살 여성 한명이 3월5일에 입주했다. 하담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18살 이상으로서 면접상담을 거친 뒤 자신이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설계하는 자립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단, 취업 준비나 구직 활동은 6개월 이내여야 하며, 취업 중엔 일정액을 모아 하담에서 나간 뒤 독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하담에서는 강한 생존자가 되는 내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 심리·문화 프로그램에도 참가할 수 있다. 성폭력에 관련한 심리치료·법률상담을 비롯해 무용치료·호신술·서예·글짓기·요리·원예·운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하담인들은 바깥의 도움도 간절하다. 하담 생활을 끝내고 가해자가 있는 예전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동안 독립 자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후원자가 되고 싶은 이들은 5천~10만원까지 매달 일정액을 기부하거나 컴퓨터·화분·그림액자·벽시계·이불·옷·먹을거리 등을 나누면 된다.(문의: 02-338-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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