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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건건 이르는 아이들에게 재판관 되어야 하나

박종국교육이야기/함께하는교육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7. 4.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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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사건건 이르는 아이들에게 재판관 되어야 하나 작성일 2009-05-22

“선생님, ○○가 껌 씹어요!”

“선생님, ☆☆가 쓰기 책을 안 쓰고 그냥 집어넣었어요!”

“선생님, ♥♥가 유리창 위에 올라갔대요!”

교직경력이 10년이 되었는데 2학년 담임은 올해 처음이라 정신이 없습니다. 몇 년 전 1학년 담임을 맡아 본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고학년 담임만 해 왔거든요. 고학년 담임에만 익숙해 있어서인지 저학년 아이들에게 적응이 잘 안 되고 느낌이 너무 다릅니다. 특히 아이들은 친한 친구든 친하지 않은 친구든, 친구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한테 일일이 모두 일러바칩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일러바치면 그때그때 잘못한 아이를 꾸중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렇게 하다 보니 친구의 일거수일투족을 선생님한테 일러바치는 아이들의 행동도 올바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친구들의 잘못을 보면 친구가 고칠 수 있도록 먼저 본인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말하곤 하지만 아이들은 “말해도 계속 똑같다”며 사사건건 일러바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친구의 잘못을 일러바치면 그 친구는 야단을 맞고 자신은 선생님한테 ‘예쁨’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일러바치는 행위의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하지만 툭하면 일러바치는 것이 이 시기 아이들이 가지는 공통  된 행동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친구들의 행동을 어른에게 이르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2학년 아이들에게 그보다 더 나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기대인가요?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산 부흥초 이데레사 교사]


1학년 교실은 아이들 잘잘못 가리다가 하루해를 보낸다고 해야겠지요. 처음 학교 가는 아이들에게 학부모든 이웃이든 겁을 주기 일쑤입니다. “학교는 유치원하고 달라. 학교 선생님은 얼마나 무서운데. 회초리로 맞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학교에 대한 첫인상을 무섭게 받아들이고 선생님은 대단한 권력자이자 공정한 심판자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생각해 보세요. 마흔 명이 복작대는 곳에서 그 조그만 아이가 자신을 잃지 않고 하루를 보내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이들마다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는 방법(처신이라고도 할까요?)도 다 다릅니다. 누가 뭐래도 끄떡도 않는 아이, 선생님 마음을 미리 알아채고 척척 해내는 아이, 다른 동무를 도와주려는 아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아이, 울보, 뭐든지 잘 하는 척하는 아이….

잘 일러 주는 아이는 공정한 것을 좋아하거나 다른 아이의 잘못으로 그렇지 않은 스스로에 대해 안정감을 갖기도 합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동무들과 잘 지내고도 싶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선생님들 행동(벌, 칭찬, 잔소리 따위), 시험, 숙제들로 가득 찼던 우리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지금은 어른이 되어 그것들이 왜 그리 겁났던가 웃음이 나오지만, 아이들은 다르지요. 자기들 현실이고 꼭 거쳐가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시간들입니다.

선생님은 일러 주는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들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화도 내고 잘잘못을 가리면서 하루를 보내도 됩니다. 또 선생님처럼 동무가 잘못한 것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도 하지요. 이렇게 되풀이하다 한 해가 갑니다. 일러 주는 아이도 선생님도 아무 성과가 없었다고요? 고학년으로 올라가 보세요. 일러 주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어 몇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룬 교육 성과입니다. 교사가 해도해도 과하지 않는 일은 아이들 마음에 멍울을 풀어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러바치기라도 해서 아이 가슴속에 억울함이 풀리거나 옳고 그른 것을 밝혀 마음이 편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일러바치지는 않지요? 그런 특성이 있는 몇 아이가 그렇지요? 그 아이식대로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세요. 어휴, 참 짜증나기도 합니다. ‘너는 왜 니 스스로 못하고 이렇게 일러바치냐?’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어요? 그렇지만 이 아이들이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줄 때도 있지요. 내 앞에서는 그냥 순한 양이던 아이가 내 뒤에서는 아이들을 마구 괴롭히는 걸 알 수 있는 것도 일러 주는 아이들 덕이라고 할까요.

저는 지금 일학년을 맡고 있습니다. 하루 내내 재판장 노릇하다가 아이들에게 하소연합니다. 일학년이 알아듣든 말든 내 힘든 것을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때는 일학년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동무라고 여기며 말합니다.

“내, 오늘 느그들 때문에 너무 속상한다. 철이 일, 민이 일, 목이 일, 현이 일…. 느그들 정말 동무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거 맞아? 내 지금 엉엉 울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우리 좀 서로 이해하고 즐겁게 살자.”

아이들이 조용히 듣고 있습니다. 내 마음도 풀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한 해를 보내는 거지요. 일러 주러 오는 아이들, 그래도 우리에게 신뢰를 보내는 겁니다. 믿음이 남아 있는 선생님, 얼마나 행복합니까? 

 

[서울 상원초 황재숙 교사]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같이 친구의 잘못을 고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 교사는 정말 힘들지요. 선생님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제가 만난 선생님들 가운데는 ‘껌 씹는 ○○보다 이르는 ☆☆가 더 밉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여러분 계셨어요. 또, 이런 아이들 특징 때문에 저학년 담임 맡기를 꺼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자꾸 친구의 잘못을 이를까요? 선생님이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친구를 이르면 잘못한 친구는 야단을 맞고 자신은 예쁨을 받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친구가 야단을 맞는 순간 상대적으로 나는 행동이 바른 어린이로 인정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애초에 교사의 말(교육)이 있었습니다. “껌 씹지 마라”고 교사가 가르치지 않았다면 아이는 이르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는 교사의 가르침을 머리에 새기고 지켰는데 친구는 껌을 씹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거예요.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요? 억울하지요. 안 지킨 친구는 혼나야 하고, 잘 지킨 나는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르지요. 더구나 이 시기 아이들은 아직 이르는 게 나쁘다는 것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직 그런 관념이 없기 때문에 서슴없이 이르는 거지요. 훔치는 게 나쁘다는 생각이 없어서 친구의 물건을 쉽게 가져가기도 하잖아요.

또, 다른 까닭으로 이르는 아이들은 없을까요? 선생님의 관심이 필요해서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선생님과 이야기가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다, 사랑 받고 싶다는 말로 바꾸어도 좋겠지요. 결국 아이의 마음속에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앉아서 이런 저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 교사는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할까요? 먼저 지도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시고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인정해 주시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 “○○가 껌을 씹었구나.”

이렇게 아이의 마음을 받아 주시고 나서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가 껌 씹는 걸 보고 너는 무슨 생각이 들었니?”


“선생님께 말하려고 뛰어올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어?”

“선생님이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

질문에 대답을 하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시 물어보고, 답을 못하거나 잘 모르겠다고 말할 때는 한번 생각해 보도록 권합니다. 그리고 나서 한두 시간이 지난 후나 다음 날 슬쩍 “그래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니?” 하고 물어봅니다.

이렇게 질문을 통해 아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돌이켜 살펴보고 알아차리도록 돕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사가 이끄는 대로 아이가 편안하게 따라오게 하려면 교사의 마음속에 짜증이나 화가 없어야 합니다. 교사의 마음이 불편하면 아이도 바짝 긴장을 해서 자기 마음을 살펴보기도 어렵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기도 힘듭니다.

 

[충남 서산시 운산초 최운규 교사]


많은 아이들이 크고 작은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떤다. 꼭 와서 일러야 직성이 풀리고 편안한가 보다. 경력이 꽤 되는 교사에게도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이 같은 행동 패턴을 가진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연스런 발달상의 특성이라는 반증이다. 이 시기의 ‘자기중심성’ ‘굿 보이, 나이스 걸 단계’ ‘권위 있는 자에게 다른 아이들보다 인정받으려는 욕구’ ‘권위자와의 공유 욕구’ 등이 그런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르는 것은 나쁜 거야, 안돼”라거나 “넌 왜 남의 나쁜 점만 얘기하니, 나쁜 녀석이구나” 하는 식의 말로 자연스런 표출 욕구, 공유 욕구를 막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다만, 수업의 흐름이 계속 단절되어 방해가 된다는 점과 성숙한 안목을 조금씩 길러 나가야 한다는 면에서 그것을 줄여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타인에 대한 생각이나 공동생활에서의 역할 등을 익히고 성숙해지도록 도울 수 있다.

딱 한 가지 방법으로 금세 이르는 행동이 줄어들거나 없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지나치게 혹독한 방법을 써서 그렇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또 다른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싹트게 될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반복적인 연습과 설명 강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어우러지면서 점점 줄어들어 2달 정도 되면 어느 정도 교사와 아이가 그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아이들을 크게 두 가지, ‘행동학습’과 ‘이르는 것에 관한 관점 넓혀 주기’로 지도할 수 있다. 행동학습은 단순 명료한 규칙을 정해서 반복적으로 일관성 있게 적용해서 습관을 들이는 것이며, 관점 넓혀 주기는 이르는 것에 관한 여러 맥락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저학년은 설명이나 호소만으로 되지 않는 나이다. 함께 행동주의적인 상담기법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간단한 행동 규칙, 말하기 규칙, 이르기 방법 등을 정해서 반복할 필요가 있다. 규칙은 일관성 있게 적용하고 강화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큰 일이거나 급한 일인 경우, 아이들의 이르는 활동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다치거나 아프거나 위험할 때는 바로 알리도록 반복 설명이 필요하며, 이르는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이르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늘 언급해 주면 행동 변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얘야, 칭찬 한 가지하고 말해 봐.”

“정확히 손을 든 후 선생님이 시키면 일어나서 말하렴. 아니면, 난 못 들은 척할 거야.”(이르고 싶은 충동을 잠시 유보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연습이다.)

“선생님도 다 안단다. 다시 잘 하는지 지켜보는 거야. 내가 알아서 잘 타이를 테니 걱정하지 마.”

“공부 시간이 끝난 후 쉬는 시간에 말해 주면 정말 좋단다.”

“다른 친구가 널 자꾸 이르면 기분이 어떨까?”(자기 중심성 벗어나기)

“이제 우리도 많이 컸으니까 유치원 동생처럼 작은 일을 다 말하지 말고 중요한 일, 아주 급한 일일 때만 말할 수 있지?”

 

출처 : 이 내용은 <초등 우리교육 2003년 7월호>에 실린 '교실 속 딜레마'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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