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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교수와 함께 읽는 논어Ⅲ

세상사는얘기/소요유소요유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0. 6. 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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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교수와 함께 읽는 한문고전]

 논어Ⅲ 
 

天之未喪斯文也이니 匡人이 其如予何리오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거늘 광 땅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한문 고전에 관해 강의하는 교양과목 수업 때 공자를 어떤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느냐고 학생들에게 묻고는, 대학(고려대학) 구내에 있는 공자의 조각상을 찾아보고 자신의 이미지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라는 숙제를 내었다. 학생들은 캠퍼스 안에 공자의 조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주쯤 뒤 여러 학생들이 대학원 건물에 있는 공자의 조각상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중국 산둥대학이 2005년 고려대학교에 증정한 이 조각상은 공자를 어질고 지혜가 많은 인물로 잘 부각시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무언가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공자는 단순히 어질고 지혜가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쉰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자신의 뜻을 펼 기회를 얻었지만, 국내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천하를 떠돌면서 자신의 이상을 전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쉰이 넘어 오늘날 사법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라는 직책을 갖게 되었을 때는 권세가를 붙잡아서 사형에 처할 만큼 매서운 면이 있었고, 천하를 떠돌 때는 상가의 개와 같이 추레한 몰골이었으며, 만년에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을 때는 평온하고 인자한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매서운 눈초리, 추레한 몰골, 평온한 얼굴을 저 조각상은 도저히 한꺼번에 담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비단 고려대학교의 캠퍼스에 있는 조각상만 공자의 모습을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대만, 일본, 심지어 미국에 있는 공자의 조각이나 초상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대개 무언가가 부족했다. 더구나 후대에 공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이마를 지나치게 불거져 나오게 만들고 해구(海口)라고 해서 커다란 입을 지닌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아예 공자가 아니라 괴물을 상상해냈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다만 사법관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었을 때의 형상을 마치 염라대왕처럼 무섭게 그린 그림은 오히려 실상을 얻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사실 논어를 읽는 것은 자기만의 공자 상(像)을 마음속에 그려내는 일이다. 일생 천 번, 만 번을 읽고 원문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운다고 해도 자기만의 공자상을 그려낼 수 없다면 그것은 논어를 공부한 것이 아니다.

1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공자 초상.

2 대사구 시절의 공자상(곡부 문물국). 3 장안 비림의 공자상

공자의 일생에 관해 신뢰할 만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권47에 작성해 둔 공자 세가(孔子 世家)이다. 세가는 제후로서 정치권력을 행사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적는 양식인데, 사마천은 공자의 문화적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마치 제후의 전기를 적듯이 공자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후에 나온 공자의 전기는 모두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단 사마천의 글도 공자가 죽고 난 400년 뒤의 글이므로 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

공자는 이름이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자(子)는 선생의 뜻으로 높여 부르는 말이다. 한문고전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공자의 이름인 丘라는 글자가 나와 있을 때 글자 그대로 읽지 않고 피하여 아무개 모(某)라고 읽는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邑), 즉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흘(紇), 자는 숙량(叔梁)이고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다. 공자는 세 살 때 부친을 잃고 빈곤 속에 자랐으나 주나라의 전통 문화를 학습하였으며 말단 관리를 거쳐 50세가 넘어서 노나라 정공(定公)에게 발탁되었다. 공자는 노나라 실력자인 세 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의 권력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기원전 497년, 56세 때 실각하여 노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 후 14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遊說)하다가 기원전 484년 69세 때 고향에 돌아가 교육에 전념했다. 이 무렵 아들 리(鯉)와 제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으며 74세로 사망했다.

공자는 주 왕조의 질서를 모범으로 삼아 이상적인 덕치(德治)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공자는 가족제도 속에 사회질서의 원리가 있다고 보고, 보편적인 도덕의 기초를 인(仁)이라는 인간 내면의 자연성에서 구했다. 또한 인(仁)이 사회에서 구현되려면 사회규범인 예(禮)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자의 사후에 제자백가가 일어났으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나와서 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천하를 떠돌 때의 공자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상가지구(喪家之狗)’라고 평했다고 한다. 상가지구란 집 잃은 개, 곧 들개라는 뜻이다. 15년 전쯤 홍콩·대만·일본·한국의 합작으로 만든 공자전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각 장면마다 검은 들개가 등장한다. 공자의 현실적 처지를 상징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상가지구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사기의 공자세가에 나온다. 정나라에서 공자는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동문 부근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그를 본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마는 요(堯) 임금을 닮고, 목은 순(舜) 임금의 사법관 고요(皐陶) 같으며, 어깨는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허리 아래는 우(禹) 임금에게 세 치 미치지 못했고, 실의한 모습은 집 잃은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이 그 말을 전하자 공자는 웃으면서 “내 모습을 묘사한 것은 과연 그럴까 알 수 없으나, 상가의 개 같다고 한 말은 옳은 듯하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공자는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몹시 어지러웠으므로 이상주의를 받아들일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후들로서는 부국강병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공리주의자들이 더 필요했다. 공자는 붙어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돌았다. 그것을 철환천하(轍環天下)라고 한다. 그 모습은 집 잃은 개처럼 실의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衛)나라의 광(匡)이란 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를 양호(陽虎)란 인물로 오인해서 핍박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文王旣沒(문왕기몰)하시니 文不在玆乎(문부재자호)아 天之將喪斯文也(천지장상사문야)인댄 後死者(후사자)가 不得與於斯文也(부득여어사문야)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천지미상사문야)이니 匡人(광인)이 其如予何(기여여하)리오.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왕이 만든 문화는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문화를 멸망시키고자 한다면 후세의 내가 이 문화에 간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거늘 광 땅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문왕은 은나라 말의 서백(西伯)으로, 주나라를 일으켰다. 그 문화적 영웅에 의해 이루어진 사문(斯文), 곧 ‘이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하는 자부심을 드러낸 말이다. 사문이라고 하면 유학이라든가 유교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악명 높았던 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말도 ‘유교의 정통을 어지럽히고 해치는 자’라는 의미로 남을 혹독하게 비방하는 말이었다.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는 하늘에 대한 관심보다 인간과 현실에 대한 관심을 깊이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선진(先進) 편을 보면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답게 사는 것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리고 당시 세상을 피해 살던 은자(隱者)들과 조우하거나 그들의 비난을 들었을 때도, 새 짐승과는 한 무리가 될 수 없으며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공자는 곤궁에 처해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논어를 읽는 일은 그 강인한 인격을 배우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 심경호 | 1955년 서울생. 휘문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일본 동도대학 문학박사(중국어학 중국문학 전공). 현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일본 메이지대 객원교수. ‘김시습 평전’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등 저서 다수.
 

출처 : 주간조선 201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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