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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 에스페로의 설빔

한국작가회의/한빛소리원고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9. 5. 1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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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 에스페로의 설빔


카테고리 : 박종국의 세상만사 | 조회수 : 16162012-01-24 오후 1:04:00


박종국의 일상이야기 2012-19 애마 에스페로의 설빔

애마 에스페로의 설빔

박 종 국

설 연휴를 앞 둔 토요일, 출근했다. 대부분 방학하면 선생도 쉬는 것으로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방학 중에도 학교는 여느 때처럼 활발하다. 우리 학교의 경우 이번 방학에 배움 다지기와 영어체험캠프, 방과 후 학교와 도서관, 보육실 등을 운영했다. 그밖에도 각기 워크숍과 직무연수로, 학생들 체험캠프 인솔로 방학이면 되레 더 바쁘다. 그만큼 학교의 일상은 방학이어도 변함없다(그렇지만 평상시보다 정규수업에 대한 부담이 없어 자유롭고, 필요하면 근무지외 연수를 신청할 수 있는 것은 방학이 있어 가능한 특권이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동료 선생님들이 먼저 퇴근했다. 나는 몇 가지 개적으로 정리할 게 있어 곧바로 퇴근을 못하고 점심 먹으러 학교 앞 국밥집으로 가려고 차를 몰고 가는데 운전대가 유난히 떨렸다. 아침 출근길에서도 차체 전체에서 평소와는 다른 소음이 들렸었다. 도중에 내려서보니까 오른쪽 뒤 타이어가 불룩 솟아있었다. 마모가 얼마나 심했던지 철심이 다 드러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머지 타이어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고물차라고 너무 신경을 안 쓴 까닭이다.

내 차는 차령이 16년이나 된다. 사람으로 치자면 거의 노년기에 이르렀다. 군데군데 검버섯이 폈고, 크고 작은 부대낌으로 입은 상처도 많다. 살갗이 터져서 속살이 다 드러나 보인다. 가장자리마다 누렇게 녹이 엉겨 붙었다. 숫제 누가 거저 가져가라고 해도 마다할 만큼 노쇠한 몰골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34만 킬로미터를 거침없이 달렸다. 이쯤이면 애마 학대 죄에 해당할 거다. 요즘 같이 단 기간에 새로 차를 바꿔 타는 세태에 어지간한 뚝심으로 버틴 것이다. 그보다 곳곳에 내 손때가 자잘하게 묻어있는 차를 폐차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이런 나를 두고 궁색을 떤다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다).

정비소에 들렀더니 냅다 차 바꾸라, 고 역정을 냈다.

“참 답답합니더. 요즘 이런 차를 모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꺼. 선생님 체면에 정말 남사시럽다 아입니꺼? 타이어가 문제 아입니더. 라지에터도 깨져 새고예. 엔진오일도 다 됐는기라예. 그래도 고칠낍니꺼? 수리비용 만만찮아예.”

“그래, 대체 얼마나 예상되는 거요?”

“배선도 갈아야 하고, 타이어까지 계산하면 못 받아도 35만원은 받아야겠심더. 그것도 타이어는 중고 타이어로 할 때 말입니더.”

“그렇게나 많이 나와요? 좀 싸게는 안 될까요? 얼굴도 모르는 사이가 아닌데….”

“아따 선생님도, 평생 단골고객이라도 할 수 없는기라예. 지금 수리할라꼬 해도 부속이 없어서 당장에 못해요. 에스페로가 단종된 지가 언젠데요. 지금 대구 부품 상에다 전화하면 빨라도 오후 5시 이후에나 작업 가능할낍니더. 작업비는 깎아줘도 부품 운반비는 따로 챙겨줘야겠슴더.”

“그래, 그렇게 합시다. 당장에 차가 퍼진 것도 아닌데 숨을 끊기는 좀 그러네요. 뒷돈이 들더라도 짱짱하게 살려내야지요. 부탁합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이 있다. 작년 연말 보험을 갱신할 때 차량보험예상 가격이 30만원이었다. 중고 타이어를 갈려 갔다가 된통 맞았다. 나는 안전상 위험은 따르지만 지금껏 타이어는 중고를 사용했다. 때를 잘 맞추면 금방 도로에 나섰다가 중고신세가 된 타이어를 만난 때도 있다. 재활용품 가게와 마찬가지로 중고타이어 가격은 네 바퀴를 다 갈아도 새 타이어 한 짝 값이면 충분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낡은 차에 완전 새 타이어를 신겨 놓으면 마치 핫바지 입고 구두 신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아 겉돈다(사실 내 차에 그만한 호사를 부릴 까닭이 없는 것이다).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뒤꽁무니에서 빵빵거린다. 언뜻 뒤돌아보니 학부형이 타란다. 설 잘 맞으시라고 인사를 건네고 그냥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차 설빔 챙겨준다고 밥 때를 놓쳐버린 것이다. 늦잠을 잔 까닭에 아침마저 걸렸는데, 이래저래 먹을 복이 없는 나는 끼니를 넘겨버릴 때가 많다. 운동장을 내다보니 배드민턴 테니스 동호회 회원들이 몰고 온 차량들이 물 찬 제비 같은 자태로 턱하니 버티고 있다. 다들 고가의 중형차다. 자못 차량에 관한 한 나는 늘 주눅이 든다.

이제쯤 수리가 다 됐는가 싶어 전화를 해 볼까했는데 정비소에서 연락이 왔다. 수리가 다 되었다는 정비소 사장의 목소리가 맑았다. 설 치레를 하려면 목돈이 꽤 드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애마가 절반을 삼켜버렸다. 설빔 치고는 고약한 노릇이다. 그러나 어쩌랴. 3천 5백만이나 움직인다는 민족대이동에 돈키호테의 명마 로시난테처럼 당당히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자못 기대가 된다. 애마는 얼마만큼 창창한 힘을 지닌 젊은이로 거듭나 있을까. 201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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